한국에서 출장을 간 금융회사 회장을 비롯한 임원진, 베트남 고위 관료들이 잇달아 소개되자 사람들은 따분한 표정을 이기지 못하고 심드렁하게 박수를 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박 감독이 소개될 때는 상황이 전혀 달랐습니다. 장내가 떠나갈 듯한 '우와' 하는 함성소리가 쩌렁쩌렁하게 행사장 공기를 관통했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점심시간. 참가자들은 각자 자리에 앉아 호텔이 내어주는 식사를 받아 음식을 먹는 그런 구조였습니다. 박 감독이 앉은 헤드테이블은 제 앞앞 테이블 정도 되었는데 "박 감독이 점심 드시기란 글렀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호텔 그랜드볼룸 원형 탁자와 탁자 사이가 만들어내는 반원의 곡선을 타고 박 감독에게 사인을 받고 사진을 찍으려는 인파가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식사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이 박 감독 손 한번 잡아보겠다고 안달이었습니다.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이 우승컵을 따낼 때 거리에 나부끼는 박 감독 얼굴이 새겨진 깃발을 직접 목격하며 박 감독 인기에 대해 피부로 느끼던 저였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시간이 어느덧 1년 넘게 지나가고 그사이 코로나19라는 고약한 변수가 전 세계를 관통했습니다. 열광의 원천이었던 국가대표팀 간 경기는 올스톱됐고 축구가 선사한 희열에 들떴던 베트남 사람들도 '코로나 블루'를 겪고 있죠. 그리고 베트남으로 향하던 한국 항공기가 태평양 상공에서 회항하는 사태를 계기로 양국 네티즌들은 서로 날선 감정싸움을 벌였고 일부 베트남 네티즌들은 태극기에 코로나 바이러스를 합성한 사진을 내걸며 한국 공격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특히 조회 수를 올려 돈을 벌 수 있는 일부 '악질 유튜버'들이 문제를 크게 만드는 데 아주 큰 단초를 제공했죠. 그런데 이런 상황이 여전히 계속되는 모양입니다.
최근 박 감독 매니지먼트사인 디제이매니지먼트는 베트남 일부 유튜버를 향해 경고장을 날렸습니다. 박 감독을 팔아 '나쁜 돈'을 벌려는 유튜버들이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다는 것이었죠. 디제이매니지먼트는 "올해 유튜브, 페이스북 등 SNS에 박 감독, 베트남 축구대표팀과 관련한 허위 영상들이 올라오고 있다. 자극적인 내용을 사실 관계 확인 없이 게시해 이윤을 창출하고 있는 특정 채널들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한다. 조속한 시일 안에 해당 영상들의 삭제 혹은 정정 조치를 공식적으로 요청했다"고 밝혔습니다.
디제이매니지먼트는 "SNS에서 지속적으로 게시되는 박 감독의 거취 문제와 연봉 삭감 이슈 등에 대한 사항들은 사실 무근이다. 사실 확인 없이 자극적으로 해석하여 동영상 등이 게시돼 대한민국과 베트남 대중들에게 불필요한 의혹과 악의적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반응들을 전하는 2차 확산으로 거짓 영상들이 기정사실화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며 "박 감독은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취임 이래 축구 외 양국의 관계 개선을 위해 힘써 왔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축구감독으로서 최선을 다할 것이며 현 소속 베트남축구 대표팀과 변함없이 믿음과 신뢰로 함께할 것"이라고 마무리했습니다.
코로나19 이후 박 감독을 둘러싼 여러 오해와 불편한 상황이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지난 4월, 코로나19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했을 때죠. 베트남의 한 온라인 매체는 '박항서 감독의 연봉 삭감, 왜 할 수 없는가?'라는 제목의 사설을 내보냈습니다. 박 감독이 고통 분담 차원에서 스스로 연봉을 삭감해야 한다는 투의 내용이었죠. 시작은 '박 감독이 지난 2년간 베트남 축구를 이끌며 훌륭한 성과를 거둔 것은 물론 적지 않은 돈을 기부해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다'고 시작했습니다만, 이어 '박 감독이 현재 국내외 스포츠 상황을 고려해 (코로나19로 불거진) 어려움이 마무리될 때까지 연봉 삭감 등으로 더 많은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고 톤을 바꿨습니다. 당시 베트남 네티즌들은 박 감독을 옹호하는 입장과 박 감독이 좀 더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입장으로 갈려 싸움을 벌이기도 했죠. 8월에는 베트남 한 기자가 기자회견장에서 "연봉 삭감은 언제하느냐"고 질문해 분위기가 싸해진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 밖에도 여러 상황이 겹쳐 오해가 쌓이고 이런 상황을 이용해 돈벌이를 하겠다는 유튜버들이 몰리며 가짜뉴스를 만들어낸 탓에 '뭐가 진짜 뉴스인지 분간이 안 가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박 감독은 이런 사태에 대해 정공법으로 돌파할 생각인 것으로 보입니다. 얼마 전 박 감독은 베트남 사회공헌 프로젝트인 '파파 박 세이브 칠드런(Papa Park Saves Children)'을 연내에 출범하기로 했죠. 이 프로젝트는 국내 품질 좋은 중소기업 제품을 베트남에서 팔아 판매가의 5%를 아동들을 위한 사회공헌기금으로 기부하는 것을 골자로 합니다. 13일 박 감독이 참석한 가운데 하노이에서 첫 행사를 열기로 했습니다. 이전에도 '기브 어 드림(GIVE A DREAM)'이라는 기부 행사를 진행한 바 있는데 가짓수를 하나 더 늘린 것입니다.
박 감독 인기가 한창 절정을 달릴 때 몇몇 기자들은 박 감독이 임기 연장을 하는 데 우려의 뜻을 표했습니다. 재계약 이후 성적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데 정상의 자리에서 물러나 좋은 기억만 남기고 가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이었죠. 당시 박 감독이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인기가 영원하지 않을 것이란 건 잘 안다. 오랫동안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인기가 거품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지켜봤다. 인기 같은 것에 연연하지 말고 그냥 내가 잘하는 것을 열심히 하겠다. 난 축구 말고는 다른 것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축구 말고는 잘하는 것도 없다. 그냥 내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코로나19 상황이 빨리 마무리돼서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이 선전을 펼치게 되면 예전처럼 베트남 거리에 박 감독 사진이 또 한 번 힘차게 나부낄 수 있을까요. 그의 겸손하고 인간적인 말투가 귓가에 아른거립니다.
[하노이 드리머(홍장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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