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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치밀한 지구 여행자 ‘못 말리는 식물들’ [책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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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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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세계를 모험하다
스테파노 만쿠소 지음·임희연 옮김
더숲 | 204쪽 | 1만6000원

1963년 11월, 아이슬란드 남쪽 바다의 해저 화산이 분화하면서 화산섬 ‘쉬르트세이’가 탄생했다. 화산재와 용암, 모래로 이뤄진 이 작은 섬에 생명이 살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기다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첫 분화가 있은 지 채 2년이 되기도 전인 1965년 봄, 섬의 모래해변에 첫 식물인 ‘카킬레 아르티카’가 자라났다. 분화가 아직 진행 중일 때였다. 관다발 식물의 일종인 이 첫 손님은 담수원 없이도 생존이 가능한 “진정한 바다의 늑대”였다.

지구에서 가장 어린 섬인 쉬르트세이는 일종의 ‘천연 실험실’이었다. 아이슬란드 정부는 새로 생긴 땅의 식생을 관찰하기 위해 허가받은 생태학자들을 제외한 사람의 출입을 엄격하게 제한했고, 사람의 방해가 없는 이곳에 속속 식물들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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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참사 이후 30년이 지난 2015년, 원전 사고로 폐쇄돼 텅 비어버린 ‘유령 도시’ 프리피야트(Pripyat)는 식물의 천국이 됐다. 도시의 아스팔트는 뻗어나오는 덤불의 힘을 못 이겨 갈라졌고, 동식물의 개체수는 사람이 살 때보다 더 늘어났다. 인간들은 살 수 없는 이곳에서 식물들은 방사능에 적응하고 생존하는 방법을 찾았다. 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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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식물학자 스테파노 만쿠소의 책 <식물, 세계를 모험하다>는 그 제목처럼 식물의 모험담을 다룬 책이다. “동물 필터를 제거한 눈으로 식물을 바라보면, 식물의 특별한 점들이 아주 선명하게 보인다”고 저자는 말한다. 필터를 걷어낸 시선으로 저자가 주목한 것은 바로 식물의 ‘이동’이다.

식물은 움직일 수 없다는 선입견과 달리, 식물은 활발한 모험가다. 저자는 식물이 수대에 걸쳐 가장 먼 땅, 극도로 열악한 지역까지 뻗어나가는 ‘정복자’라고 말한다. “글쎄, 우리는 잘못 알고 있다. 식물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들은 먼 곳까지 이동한다. 단지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다.”

척박한 화산섬까지 식물은 어떻게 찾아왔을까. 해류, 물고기의 알, 흰멧새의 모래주머니, 섬의 상공에서 배설물을 떨어뜨리는 갈매기와 거위가 ‘씨앗의 운반자들’이었다. 현재 쉬르트세이는 수백종의 무척추동물과 다양한 식물의 서식지다. 2008년엔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지정됐다.

저자가 소개하는 식물들은 치밀한 전략가이자 혁신적인 모험가다. 삽시간에 주변을 ‘죽음의 땅’으로 만들어버린 체르노빌에서도 그랬다. 최악의 원전 사고로 꼽히는 1986년 체르노빌 참사 이후 원자력발전소 반경 30㎞는 ‘출입금지구역’이 됐다. 5만명이 살던 프리피야트도 그 ‘유령 도시’ 가운데 하나다. 참사 30여년이 흐른 뒤, 아무도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졌던 이 도시는 “오늘날 구소련에서 가장 다양한 생물 서식지 중 하나가 됐다”고 저자는 말한다. 덤불이 아스팔트를 뚫고 자랐고, 6차선 대로는 ‘그린 리버’로 변했다. 사고 전보다 식물의 종은 물론 개체 수도 늘었다. 식물에는 방사능보다 사람이 더 위협적이었을까. 저자는 “식물이 역사적으로 역경에 맞서는 특별한 저항력을 개발해왔다”고 말한다. ‘방사성 핵종 흡수’라는 식물의 놀라운 능력 덕분이란 것이다.

저자는 식물의 이동을 막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시칠리아섬 활화산 지대 출신인 금방망이속 식물은 영국의 대학 담벼락을 점령한 데 이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까지 뻗어나갔다. 척박한 환경에서 얻은 강한 생존력을 무기로 이 식물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철도의 ‘무임승차자’가 돼 무궁무진 뻗어나갔다. 기후가 확연히 다른 북쪽으로 나아가며 지역종과 교배해 살길을 찾았다. 저자는 “자연에는 세계화가 늘 존재해왔다”며 “다행히 식물들에게는 관세, 국경, 추방, 장벽 개념이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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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러시아 연구진이 시베리아 툰드라지대의 다람쥐굴 속에서 약 3만9000년 동안 얼어붙어 있던 패랭이과의 식물 실레네 스테노필라 씨앗을 발아해 꽃을 피우는 데 성공했다. 푸시치노 | AP연합뉴스


식물은 시간 여행자이기도 하다. 2012년, 3만9000년 동안 시베리아 툰드라 지대에서 얼어붙어 있던 패랭이꽃 씨앗이 꽃을 피웠다. 러시아 연구진은 다람쥐가 굴속에 저장해둔 씨앗을 되살려 꽃을 피우는 데 성공했다. 2005년 이스라엘에선 마사다 요새에서 발굴된 항아리 속 대추야자 씨앗이 2000년 만에 부활했다.

식물은 때로 긴 여행에 동물을 이용한다. 동물의 털에 달라붙거나, 먹이가 돼 다른 곳으로 뻗어나간다. 멸종 동물에게 생존을 의탁한 식물은 동물과 함께 사라지기도 한다. 잘못된 선택을 한 ‘시대 착오자들’ 가운데는 인간과 손잡은 식물들도 있었다.

바나나씨를 본 적이 있는가. 우리가 먹는 바나나는 대부분 씨가 없다. 동그랗고 커다란 씨앗을 가진 아보카도는 인간의 사랑을 받으며 고향 멕시코를 떠나 세계 각지로 뻗어나갔다. 하지만 저자는 인간과 손잡은 아보카도가 곧 씨 없는 바나나, 포도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2017년 영국의 한 슈퍼마켓 체인은 ‘칵테일 아보카도’라는 이름의 씨 없는 아보카도를 팔기 시작했다. 저자는 과일이 인간과 관계를 맺는 것은 “악마와의 거래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식물에서 씨앗 생산 능력을 박탈하면, 식물은 어떻게 얼마나 복제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식품 산업의 노예일 뿐, 더 이상 생명체가 아니다. 단순한 생산 수단이 되는 것이다.”

씨 없는 과일은 먹기 편하지만, 이런 과일은 유성생식이 아닌 생장만을 통해 복제돼 종의 유전자 다양성이 사라진다고 저자는 경고한다. 바나나도 원래는 씨가 있었다. “우리가 바나나 씨앗을 본 적이 없듯이, 훗날 우리 아이들 역시 아보카도 안에 씨앗이 있었다고 상상조차 못할 것이다.”

지구가 존재하는 한 식물의 모험은 계속될 것이다. 저자는 ‘알고 보면 시끌벅적한’ 식물의 세계를 경쾌하고 우아하게 소개한다. 인간의 여행보다 흥미진진한 식물의 여행기를 읽다 보면, 우리 주변의 식물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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