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법과 여성에 주목 ‘정의의 감정들’ 펴낸 김지수 교수
젠더와 신분제 차별 속에서도
여성 또한 법적 주체였던 시대
“소인이 세상에서 당한 원통한 사정을 감히 아룁니다. (…) 부디 이 과부를 도우셔서 제 땅을 빼앗으려는 승운의 못된 계략을 멈춰주시고, 제게 한 거짓 고소를 거둬주신다면 제가 원(寃)을 덜 수 있을 겁니다.” 경오년 2월, ‘말금’이란 이름의 여종이 고을 수령에게 원통함을 호소하는 소지(所志·청원이 있을 때 관아에 내는 소장)를 제출했다. 말금은 죽은 남편으로부터 땅을 상속받았지만 남편의 친족 ‘승운’이 나타나 소유권을 주장하자 맞고소를 한 것이다. 수령은 조사를 진행했고 말금은 땅을 되찾았다.
조선시대는 노비제와 남녀차별이 존재하는 신분제 사회였다. 그러나 말금처럼 계급의 가장 말단에 있는 여성 노비 역시 소송 권한을 갖고 있었다. 노비부터 양반까지 조선시대 여성들이 신분과 관계없이 ‘법적 주체’로 인정받고 독립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김지수 조지워싱턴대 역사학과 교수는 신간 <정의의 감정들>(너머북스·사진)에서 조선시대 여성들이 국가에 낸 소지 600여건을 분석해 당시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법적 주체로 권리를 행사했음을 밝힌다.
<정의의 감정들>은 조선시대 여성들이 신분과 상관없이 법적 주체로서 권리를 행사했음을 밝힌다. 거리에서 판결이 이뤄지는 모습을 그린 김홍도의 ‘거리의 판결’(왼쪽 사진)과 평민 여성 김조이가 관에 억울함을 호소하며 쓴 한글 소지. 국립중앙박물관·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유교 영향으로 억울한 감정 중시
‘원’ 달래주며 국가 체제 유지도”
조선은 엄격한 계급사회였지만 노비는 자신의 주인을 제외하고는 양반이나 평민을 상대로 소송을 낼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김 교수는 e메일 인터뷰에서 백성의 ‘원(寃)’, 즉 원통함을 풀어주는 것이 조선시대 법 담론의 핵심이라고 분석했다. 그것을 국가와 군주의 도리로 여겼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조선사회가 억울한 감정을 중시한 것은 민본사상을 기반으로 한 유교사회의 영향”이라며 “백성이 나라의 근간이며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점을 중시했고, 1401년 신문고를 도입해 왕이 백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통로를 제도화했다”고 설명했다.
조선이 평등한 사회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법적 공간에서는 하층계급이 소원(訴寃)의 법적 능력을 행사함으로써 양반에게 공개적으로 도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동시대 중국 또는 일본과 비교했을 때 조선은 젠더와 신분제 차별 속에서도 모든 백성이 법적 주체로 인정받고 국가에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법적 통로가 존재했다”며 “천민 신분인 기생의 자식이 억울하게 관에서 고문을 당해 죽으면 그 수령을 관찰사 또는 왕에게 고발해 억울함을 호소했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조선은 남녀와 신분 차별이 뚜렷했지만, 본인의 젠더 또는 신분 내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는 법적으로 보장됐습니다. 만일 침해를 당했다면, 여성이든 천민 출신이든 남편 또는 주인만 아니면 타인을 상대로 본인의 법적 능력을 행사해 소를 제기할 수 있었어요.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성별이나 신분을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감정이 있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원통함이 쌓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모든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게 중요했습니다.”
이는 신분질서를 공고히 하는 등 체제 유지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백성의 ‘원’을 풀어줌으로써 반란을 막는 효과도 있었다. 국가의 본질적 관심사는 평민과 노비의 고충을 들어주면서 그들이 신분질서에 도전하는지를 감시하고, 그 경계를 넘지 않도록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다만 김 교수는 “전근대 시기 국가와 민(民)이 끊임없이 억울함을 소통할 수 있는 사법 공간이 존재했다는 것은 긍정적인 측면”이라며 “조선 전기에는 불법으로 간주됐던 사건들이 민이 억울함을 호소함에 따라 후기로 가면서 법제화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일례로 백성이 수령을 고발하는 것은 조선 전기에는 허용되지 않았지만 백성들 요구로 합법화됐다. 18세기 초에는 평민들의 ‘소원’으로 새로운 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양반이 평민을 착취해 노비로 만드는 ‘압량위천’이나, 관아에서 고신을 남용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됐다. 사적 영역에서 겪은 고통을 고발해 공적 담론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이렇듯 조선은 감정을 상당히 중요하게 취급했고 ‘원’의 감정은 그 핵심이었다. 김 교수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국민의 억울함을 듣고 해결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국가의 의무 중 하나”라며 “국가가 민의 목소리를 무시하면 결국 반란을 초래한다는 원칙은 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조선 후기 여성들은 임금에게 억울함을 토로하는 데 적극적인 당사자로 등장했다. 동시대 중국이나 유럽에서 결혼한 여성이 남편을 통해서만 법정에 설 수 있었던 것과 달랐다. 특히 여성들은 한글로 소지를 제출해 한문이 지배하는 공적인 문자 영역에 도전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이를 “여성 송자들은 한글로 글을 쓰는 관행을 통해 조선의 문예문화에서 저속한 대본으로 여겨졌던 한글을 법률문서에서 공식적인 언어로 격상시켰다”고 분석했다.
책은 조선시대 여성들의 젠더와 신분, 법 감정을 처음으로 연구한 결과물이다. 저자는 일제강점기는 물론 해방 이후 지속된 오해로 조선시대 여성의 권리능력이 그간 얼마나 잘못 이해돼왔는지를 소지·공문서 등 사료 연구를 통해 밝혀낸다. 김 교수는 ‘음욕’을 주제로 조선시대 감정사와 젠더사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 ‘억울함’이 성별·신분에 상관없이 국가가 해소해준 감정이라면, ‘음욕’은 국가가 차별하며 통제했던 감정입니다. 국가가 개인의 음욕이라는 가장 사적인 분야를 어떻게 통제했고 젠더 규범이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 인터랙티브:자낳세에 묻다
▶ 경향신문 바로가기
▶ 경향신문 구독신청하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