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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월)

이슈 5·18 민주화 운동 진상 규명

‘이름 없이 40년’ 5·18무명열사 5명은 누구?…4세∼50대까지 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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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장대비 속에서 묘비에 ‘무명열사’라고 쓰인 봉분이 헐렸다. 2002년 이곳에 이름 없이 묻힌 지 18년 만이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이날 묘를 개장해 ‘뼛조각’을 채취했다. 뼛조각이 채취된 분묘는 5·18 당시 사망했지만 신원을 확인하지 못해 무명열사로 묻힌 5명 중 3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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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19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유전자 시료를 채취하기 위해 무명열사 봉분을 개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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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진상조사위는 5·18무명열사 5명에 대해 DNA 분석을 통한 신원확인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날 분묘를 개장한 3명은 기존에 채취해 뒀던 뼛조각을 모두 사용해 DNA 분석을 위해서는 추가 시료가 필요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망했지만 40년 동안 가족을 찾지 못해 ‘무명열사’로 묻힌 5명의 신원을 찾는 작업이 본격화됐다. 무명열사 5명은 5·18 당시 숨졌지만 신원을 확인하지 못한 경우다. 이들은 5·18 직후 ‘무연고자’로 분류돼 망월동 옛 묘역에 묻혔다.

당시 이들처럼 묻힌 시민 사망자는 11명이었다. 이들에 대한 신원확인 작업이 처음으로 이뤄진 것은 2002년이었다. 광주시는 2001년부터 11구의 유해를 국립5·18민주묘지로 이장하면서 전남대학교법의학교실에 의뢰해 DNA 분석을 통한 신원 확인에 나섰다. 이를 통해 모두 6명의 신원이 확인됐지만 5명은 끝내 가족을 찾지 못하고 또다시 무명열사로 묻혔다.

5·18진상조사위는 그동안 DNA 분석 기술이 많이 발전한 만큼 다시 한 번 신원 확인에 나서기로 했다. 기존 DNA 방식은 아버지 쪽 유전자와 대조하는 방식이었다. 이번에 사용하는 방식은 아버지 쪽의 형제, 삼촌, 조카뿐 아니라 어머니 쪽의 외삼촌, 이모까지도 확인할 수 있다.

대조할 수 있는 가족 범위가 기존보다 훨씬 넓어지는 만큼 가족을 찾을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진다. 대조군이 많아진 것도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현재 광주시가 확보하고 있는 5·18행방불명자 관련 DNA는 182명의 가족 370명이다.

2016년 5월 기자가 5·18무명열사 5명에 대해 취재했던 내용을 다시 정리했다. 당시 기자는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수장고에 보관 중인 유품과 발굴에 참여했던 관계자로부터 유골 계측 자료 등을 받아 이들을 추적했다.

키는 경찰이 백골 변사체 등을 검시할 때 사용하는 ‘키 복원 공식’을 이용했다. 유골의 대퇴부 길이로 키를 추정하는데 ±3.8㎝의 오차가 있을 수 있다. 나이는 윤창륙 조선대 치과대학 교수가 치아의 마모 상태 등을 토대로 추정했다. 치아 상태로 나이를 추정하는 방식은 정확도가 매우 높다. 50대는 ±3세, 20~30대 ±2세, 10대 ±1세, 10세 이하는 ±6개월 정도 오차가 있을 수 있다.

■쌀 포대에 묻혔던 4살 꼬마(묘지번호 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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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5·18무명 희생자를 이장할 당시 만 4세로 추정되는 아이의 유해와 함께 발굴된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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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도 없이 ‘정부미’ 쌀 포대에 담겨 묻혔다. 2001년 망월동 옛 묘역에서 발굴 당시 끈으로 묶인 포대 안에는 비닐로 감싼 남자아이의 유골이 들어 있었다. 추정 나이는 만 4세. 유골계측이 이뤄지지 않아 키는 복원하지 못했다.

1980년 6월7일 검찰의 요청으로 시신을 검안한 조선대병원 의사는 사망 원인을 ‘좌후경부 맹관총상’으로 적었다. 목 왼쪽 뒷부분에 총을 맞아 숨졌다는 의미다. 의사는 검시 10~12일 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고 검찰은 사망 일시를 ‘1980년 5월27일’로 적었다.

아이의 시신은 두 번이나 땅에 묻혔다가 다시 나왔지만 가족을 찾지 못했다. 5·18 당시 광주 남구 효덕동 뒷산에 매장됐던 시신은 주민의 신고로 5·18 직후 발굴됐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보관 중인 보존처리된 분홍색 상의에는 야구공의 실밥과 비슷한 무늬가 있다. 또 다른 검시기록에는 주머니에 ‘1000원’이 들어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5·18행방불명자 중에는 이 유해와 나이가 비슷한 어린이가 있다. 5월20일 기차를 타고 광주에 왔다가 외할머니·외삼촌과 함께 행방불명됐던 당시 만 5세인 박광진군이다. 5·18진상조사위는 박군 어머니의 DNA와 이 유골의 DNA를 대조할 계획이다.

■체육복에 ‘공업계고 마크’ 20대 초반 청년(묘역번호 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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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5·18무명 희생자를 이장할 당시 20대 초반으로 추정된 유해와 함께 발굴된 고등학교 체육복 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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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 당시 유골 상반신 쪽에는 체육복, 하반신에는 교련복 바지가 잘려진 채 놓여 있었다. 푸른색 줄무늬 양말을 신고 있었다. 발굴단은 “사망 당시 입고 있던 옷”으로 추정했다. 그의 나이는 20대 초반으로 추정됐다. 복원한 키는 161.7㎝였다.

파란색 체육복 가슴에는 학교 마크인 ‘교표’가 찍혀 있다. 3개의 나뭇잎 중앙에 톱니바퀴가 있고 그 안에 고등학교를 의미하는 ‘고’자가 한글로 쓰여 있다. 나뭇잎 밑에 펜촉 2개가 교차하는 것이 특징이다.

톱니바퀴는 당시 공업계 고등학교에서 주로 사용하는 교표였다. 광주와 전남지역 200여개 고등학교의 교표를 확인한 결과 현재의 숭의고등학교의 교표와 상당히 유사했다. 숭의고는 980년까지 숭의실업고등학교였다.

고등학교 체육복에 교련복을 입고 있었던 만큼 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엘리다’ 시계 찬 50대 중반 남성(묘역번호 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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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5·18무명 희생자를 이장할 당시 50대 중반으로 추정된 유해와 함께 발굴된 손목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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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의 왼쪽 팔에서는 발굴 당시 금속 재질의 시계가 반짝였다. 시계는 비교적 온전한 모습이었다. 시계 금속 밴드에는 ‘ORIENT(오리엔트)’라고 적혀 있다.

시계 몸체 뒷면에는 ‘ELIDA(엘리다)’라는 영문이 확인됐다. 엘리다는 1970년대 프랑스의 시계 브랜드다. 지금은 아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다른 유명 브랜드와 함께 국내에서 ‘짝퉁’이 유통될 정도였다. 시계의 몸체는 프랑스, 금속 밴드는 국내 제품이었던 것이다.

당시 시계는 상당히 고가였다. 발굴 당시 군복 하의를 입고 있었던 만큼 그가 시민이 아니라 군인이었일 가능성도 있다. 키는 167.8㎝로 추정됐다. 1980년 6월 작성된 검찰의 최초 검시조서에 ‘신원미상’으로 분류된 시신 중 나이가 50대로 추정된 시신은 없었다.

■척추에서 스테인리스 철사 나온 30대(묘역번호 4-90)

발굴 당시 척추 뼈에서 4~5개의 가느다란 스테인리스 철사가 줄 지어진 채 발견됐다. 철사의 끝은 돌려 묶여 있었고 연결부는 가는 고무관이 감싸고 있었다.

추정 나이는 30대 중반. 키는 165㎝로 추정됐다. 법의학자들은 척추 부근 스테인리스 재질의 철사가 ‘의료용’이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사망 전 척추 수술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앞니 빠지고 윗니에는 금니한 10대(묘역번호 4-93)

16세 전후로 추정된다. 유품은 ‘붉은 양말’이 전부였다. 유골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윗니에서 금니 1개가 발견됐다. 또 앞니가 빠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키는 155.9㎝로 추정된다.

금니가 발견됐다는 것은 그가 생전에 치과 치료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윤창륙 조선대 치과대학 교수는 “1980년에 금니는 어느 정도 가정 형편이 뒷받침돼야 했다”면서 “충치 등이 심한 청소년을 치과에 데려가 치료해준 가족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글·사진 강현석 기자 kaj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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