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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항미원조 주장, 한국은 어디에 서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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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한국전쟁을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70년 전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을 두고 미국과 중국이 맞붙은 형국이다. 발단은 지난 10월 23일 한국전 참전 기념행사에서 나온 중국 시진핑 주석의 발언이다. 이날 시 주석은 “한국전쟁은 미국 제국주의에 맞선 위대한 승리”라고 말했다. 다음날 미 국무부의 모건 오테이거스 대변인은 “한국전쟁은 북한의 남침”이라며 맞불을 놓았다.

표면적으로 보면 ‘누가 침략했느냐’를 놓고 벌이는 갈등이다. 그러나 톺아보면 미·중 패권 경쟁에 한국전쟁이 이용되고 있다. ‘미국 제국주의의 침략’, ‘중국 공산당이 불러온 참화’ 등의 날 선 발언은 양국이 단순히 역사 논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중국 외교부가 미국의 한국전쟁 발언을 비난하면서도 “한·중 관계가 더욱 발전하기 원한다”는 입장을 내놓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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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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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어려운 것은 한국의 대응이다. 전쟁의 당사자인 만큼 본질이 미·중 갈등임을 알고도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지난 26일 외교부 국정감사에서 국민의힘 의원들을 중심으로 “중국에 보다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요구가 쏟아졌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여러 사항을 고려했을 때 원칙적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강 장관의 원론적 답변은 미·중 갈등이 실존적 딜레마로 작용하는 한국 외교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동시에 미·중 사이에 전략적 모호함을 선택해 정쟁의 구실을 제공한 것이기도 하다. 벌써 이번 사태를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응하는 정부의 태도와 비교하는 분석까지 나온다. 어떤 전략이 최선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과거 미국과 중국이 한국전쟁으로 얻은 것을 통해 오늘의 의도를 유추해볼 수는 있다.

중국의 발언은 어디까지 사실인가?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발발 3개월 만인 1950년 9월 27일 중대한 변화를 맞는다. 김일성은 북한주재 중국대사 니즈량에게 “38선 및 그 이북지역을 방어할 능력이 없다”고 호소했다. 북한은 이틀 뒤 소련에 지원을 요청했고, 10월 1일에는 중국의 개입도 요청했다. 이에 마오쩌둥은 10월 2일 열린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한국전 참전 의사를 밝힌다. 중국 인민해방군을 ‘항미원조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파병하는 구체적 계획까지 이날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예정된 출병일은 10월 15일이었다. 하지만 소련이 공군 지원을 거절하며 문제가 생겼다. 마오쩌둥은 출병을 보류하고 10월 13일 다시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었다. 결과적으로 중국은 불리한 정황을 재확인하고도 참전을 결정했다. 이는 중국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지키고 ‘제국주의 침략’에 맞섰다고 선전하는 근거가 된다.

문제는 선전처럼 중국의 참전이 공산혁명을 추구한 북한과의 유대에 근거하느냐는 점이다. 마오쩌둥은 참전을 결정한 직후 저우언라이에게 편지를 보내 “참전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크고, 참전하지 않음으로써 받는 손실은 엄중하다”고 했다. 미군이 북한지역에 주둔해 직접 대치하는 상황을 우려한 것이다. 이는 중국의 참전이 수동적인 대응이자 지정학적 위험을 고려한 전략적 선택임을 보여준다.

능동적 개입을 통해 이익을 얻고자 한 정황도 발견된다. 한국전쟁 연구의 권위자인 화둥사범대학 션즈화 교수는 “유엔군의 38선 돌파 이전에 중국의 능동적 참전 의사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1950년 7월 19일 김일성은 북한주재 소련대사 슈티코프에게 “마오쩌둥으로부터 중국이 자국 군대를 파견할 수 있으며, 이미 4개 군단 32만명이 준비되어 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이 시기는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약 두달 전으로 전황은 북한에 유리했다.

중국 외교부의 “내전이었던 한국전쟁이 미국의 개입으로 성질이 변했다”는 주장도 일방적인 의견이다. 한반도에서 외국 군대가 격돌하는 국제전 양상과 동북아지역으로의 전선 확대는 중국 참전 이후에 나타났다. 중국에 한국전쟁은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지역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는 발판이 됐다. 결과적으로 중국의 한반도 전략은 국익을 위해 계산된 성격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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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군의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무엇을 얻었나?

미국에 한국전쟁은 일본을 동반자로 한 동아시아 질서의 시작점이다. 미국은 1947년부터 일본과의 평화조약 체결을 추진했다. 하지만 당시 소련과 중국이 반대하면서 일본을 아시아의 공장으로 재건하려던 미국의 계획이 차질을 빚었다. 교착상태에 빠진 대일평화조약은 한국전쟁의 발발로 해결됐다. 특히 중국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일본의 중요성과 조기강화의 필요성은 급부상했다.

결국 한국전쟁 중인 1951년 9월 미국은 일본과 이른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이 조약은 일본의 전쟁 책임을 사실상 면제해 향후 일본과 주변국 사이의 역사문제, 영토문제를 야기했다. 당시 한국은 조약 서명국 지위에 포함되지 못했지만 조약이 만든 질서에는 구속됐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미국을 정점으로 한 양자적 동맹관계와 미군기지 네트워크다.

일본의 국제사회 복귀에 대해 주변국들은 반발했다. 이 때문에 미국은 동아시아에 일본을 포함한 집단안전보장체제를 도입하지 못했다. 대신 양자 동맹을 바탕으로 각국에 미군이 주둔하는 기지를 만들고 공산권을 봉쇄하는 군사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각국은 미국이 필요한 안보 전략을 수립하며 이에 부응했다. 즉 미국의 동맹국들은 동아시아의 안보를 분업하고 있지만, 이는 제도화된 집단안전보장체제와는 다른 구조가 됐다.

미군이 오랜 기간 주둔한 곳이 한국, 대만, 일본이다. 현재 대만은 미국 첨단 무기 수입으로 중국과 갈등을 빚고 있고, 일본은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열도)에서 중국과 갈등을 빚고 있다. 한국을 제외하면 미국은 관계국들을 패권 경쟁에 깊숙이 연루시키고 있다.

한국은 미국의 동맹이지만 중국을 견제하는 ‘쿼드’와 같은 안보협력체 참여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 미국과 중국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행보는 한국전쟁과 그 이후 형성된 질서가 남긴 교훈이다. 미국과 중국은 한국전쟁을 이용해 서로의 체제와 행보를 비난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전쟁의 본질에서 벗어난 소모적 다툼까지 한국이 개입할 필요가 있을까. 국제외교전문가들도 속 시원한 답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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