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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 (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초일류 기업' 약속 실천하고 떠났다…주요 업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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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별세]반도체 사업 성장부터 평창 올림픽 유치까지

뉴스1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서울 일원동 서울삼성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8세. 1942년 에서 태어난 고인(故人)은 부친인 이병철 삼성창업주 별세 이후 1987년 삼성그룹 2대 회장에 올라 삼성그룹을 이끌었다. 사진은 1987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취임 당시의 모습. (삼성전자 제공)2020.10.25/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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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김동규 기자 =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키겠습니다"(1987년)

25일 별세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1987년 만45세의 나이로 삼성그룹 회장에 오르면서 약속 하나를 했다. 삼성그룹의 30여년간의 업적을 돌이켜 보면 고(故) 이 회장의 약속은 실현됐다.

이 회장이 취임한 1987년 10조원이 안되던 삼성그룹의 매출은 2018년 기준 386조원을 넘기면서 39배 늘어났고, 시가총액은 1조원에서 396조원으로 396배나 커졌다. 특히 이 회장이 직접 이끌었던 삼성전자는 글로벌 초일류 기업이 되면서 현재 세계 굴지의 전자회사가 됐다.

◇반도체 사업 직접 부친 설득…휴대폰 사업도 신수종 사업으로 지목

지난 1974년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한국반도체 인수를 결정했는데 이건희 회장이 설득이 주효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파산 직전이었던 한국반도체 인수를 두고 일각에서는 'TV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들면서, 최첨단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 '미국 일본보다 20,30년 뒤쳐졌는데, 따라가기나 하겠는가?'와 같은 비판이 나왔다.

심지어 일본의 한 기업 연구소는 '삼성이 반도체를 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내놓으며 비판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회장은 당시 "언제까지 그들의 기술 속국이어야 하겠습니까?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 삼성이 나서야지요. 제 사재를 보태겠습니다"고 말하면서 인수를 성사시켰다.

1986년 7월 삼성은 1메가 D램을 생산하면서 반도체 산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후 64메가 D램 개발로 기술 주도권을 확보한데 이어 생산량을 늘리며 시장 점유율도 1위를 기록하게 된다.

반도체의 성공은 애니콜로 대변되는 휴대전화가 이어받았다. 신경영 선언 이후 이건희 회장은 삼성의 신수종 사업으로 휴대폰 사업을 지목했다.

이 회장은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옵니다. 전화기를 중시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휴대폰 사업에 집중한다. 1995년 8월 애니콜은 전세계 휴대폰 시장 1위인 모토로라를 제치고, 51.5%의 점유율로 국내 정상에 올라섰다. 당시 한국은 모토로라가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유일한 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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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서울 일원동 서울삼성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8세. 1942년 에서 태어난 고인(故人)은 부친인 이병철 삼성창업주 별세 이후 1987년 삼성그룹 2대 회장에 올라 삼성그룹을 이끌었다. 사진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호텔에서 삼성 임원진들에게 '신경영' 구상을 밝히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2020.10.25/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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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라" 1993년 신경영 선언

1993년 이건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은 삼성전자를 한단계 더 도약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 당시 삼성전자는 품질보다 생산량 늘리기에 급급했던 생산라인에서 불량이 난 세탁기 뚜껑을 손으로 깎아서 조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모습이 사내 방송으로 보도됐고 파장이 커지면서 질보다 양을 앞세우던 기존 관행에 제동이 걸렸다.

당시 이 회장은 삼성의 글로벌 위상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 중이었는데 미국의 대표적인 전자제품 양판점인 'Best Buy(베스트 바이)'를 돌아보다 진열대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삼성 제품을 보고 “삼성이라는 이름을 반환하라고 했다. 먼지 구덩이에 처박힌 것에 어떻게 삼성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삼성 제품이 뛰어난 품질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이건희 회장에게 불량 세탁기 고발 영상이 담긴 사내방송 테이프가 전달됐고, 이를 본 이 회장은 그동안 쌓여온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말로 유명한 신경영 선언을 내놨다.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된 신경영 대장정은 총 8개 도시를 돌며 임직원 18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350여 시간의 토의로 이어졌다.

지난 1996년 이 회장은 멕시코 티후아나 전자복합단지를 방문중이었는데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긴급 사장단 회의를 소집해 비상경영을 선포했다. 이후 삼성그룹은 경영 전 분야에 걸쳐 3년 동안 원가 및 경비의 30%를 절감하겠다는 '경비 330 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했고, 한계 사업을 과감히 정리하고 차세대 사업에 집중하는 한편, 경영 합리화와 사업재구축을 목표로 비상경영을 진행했다.

삼성이 비상경영에 들어간지 1년 후인 1997년, 한국에는 IMF 외환위기가 닥쳤지만 위기에 미리 대비한 삼성은 외환위기 속에서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급변하는 세계 디지털 시장을 선점하는 기회를 만들어냈다.

◇학력제한 폐지·여성 우대·중소기업과 상생

1957년 1월 삼성그룹은 민간 기업 최초로 공개 채용 제도를 도입해 27명의 사원을 채용했다. 이후 삼성은 1995년 한국 기업사에 변혁을 가져 온 또 하나의 중대 발표를 했다.

'삼성 공채, 학력제한 폐지' '학력 위주에서 실력 위주로'라는 슬로건으로 이 회장은 학력과 성별, 직종에 따른 불합리한 인사차별을 타파하는 열린 인사를 전격 지시했다.

이 회장은 당시 "대학 졸업장과 관계없이 입사할 수 있는 기회를 동일하게 주고 입사 후 승진, 승격에도 차별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삼성의 입사 기준은 학력이 아니고 실력입니다"고 강조했고, 이때부터 삼성은 대졸 공채 대신 3급 신입사원 입사 시험을 실시했다. 시험에 합격할 실력만 되면 대학 졸업장은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

또 이 회장은 여성에 대한 차별을 과감히 없애고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는 "여성 인력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자전거 바퀴 두 개 가운데 하나를 빼 놓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다"고 말했다.

이 회장 취임 이듬해인 1988년 삼성은 중소기업과 공존공생을 선언했다. 삼성이 자체 생산하던 제품과 부품 중 중소기업으로 생산이전이 가능한 352개 품목을 선정해 단계적으로 중소기업에 넘겨주기로 결정하면서 큰 화제가 됐다.

또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 이 회장은 작게는 삼성의 발전을 위해, 크게는 대한민국 경제 성장을 위해 협력업체 육성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그는 "삼성그룹의 대부분이 양산조립을 하고 있는데 이 업의 개념은 협력업체를 키우지 않으면 모체가 살아남지 못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이후 1996년 신년사에서 협력업체를 신경영의 동반자로 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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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서울 일원동 서울삼성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8세. 1942년 에서 태어난 고인(故人)은 부친인 이병철 삼성창업주 별세 이후 1987년 삼성그룹 2대 회장에 올라 삼성그룹을 이끌었다. 사진은 2011년 7월 6일(현지시간) 남아공 더반에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가 발표되는 순간 이건희 IOC 위원(가운데)이 기쁨의 눈물을 보이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2020.10.25/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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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올림픽 유치에 공헌…제품 디자인도 강조

이건희 회장은 한국 최초의 동계올림픽이었던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에도 큰 공을 세웠다. 이 회장은 2009년부터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적극 나섰다. 그는 1년 반 동안 170일간 해외 출장을 다니며 IOC 위원들을 만났고, 이 기간 이건희 회장이 평창 유치를 위해 전세계를 누빈 거리는 지구를 5바퀴 돌고도 남았다.

이 회장은 저녁 약속을 했던 IOC 위원이 다른 일정이 늦어져 약속을 취소하겠다 했지만, 1시간 30분을 기다려 만났고, IOC 위원과의 식사자리에는 항상 당사자의 이름이 새겨진 냅킨을 테이블에 비치하는 세심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이 회장은 1996년을 '디자인 혁명의 해'로 선언하고 디자인 경쟁력 강화에 더 박차를 가했다. 이후 2002년 4월 휴대폰 'SGH-T100'이 출시됐는데, 이 회장은 이 제품 개발 단계부터 꼼꼼히 디자인을 살폈고 잡기 쉽게 넓으면서도 가볍고 얇은 디자인을 제안했다. 조가비 형태의 이 휴대폰은 '이건희폰'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출시와 함께 큰 화제가 됐고 글로벌 1000만대 판매라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이후 2005년 이 회장은 세계적 명품과 디자인의 격전지인 밀라노에 주요 사장들을 소집하고 '디자인 전략회의'를 주재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삼성의 디자인 경쟁력을 1.5류로 평가하며 다시 한번 글로벌 초일류 수준으로 혁신할 것을 주문했다.

이 회장은 "삼성 제품의 디자인 경쟁력은 1.5류입니다. 제품이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시간은 평균 0.6초인데 이 짧은 순간에 고객의 발길을 붙잡지 못하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고 말했다.

이후 삼성의 디자인은 2006년 와인잔 형상의 보르도TV가 한 해에만 300만대가 판매되며 세계 TV시장의 판도를 흔들어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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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ws1 이지원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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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kim@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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