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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 (금)

“불량은 암입니다” 세계 초일류의 길 ‘이건희 신드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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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93년 이건희 회장, 신경영 선언. 사진 삼성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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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은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일반적인 잣대로 보면 사업가보다는 과학자나 예술가에 어울리는 기질이었다. 여러 사람과 어울리기보다 혼자 몰입하길 좋아했다. 세상은 그를 ‘은둔의 경영인’이라고 불렀다.

그에 대한 시각과 평가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에 대해선 이견이 없다. 기업인으로서 한국 근현대사에서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진정한 세계 1위 기업을 실현해 냈다는 점이다.

● 몰입의 경영인

어린 시절 이건희는 외로운 소년이었다.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사업가 이병철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의 사업이 바쁘다는 이유로 젖을 떼자마자 경남 의령의 친가로 보내졌다. 할머니가 어머니인줄 알고 자라다 3세가 돼서야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곧이어 터진 전쟁과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마산, 대구, 부산으로 5번이나 학교를 옮겼다. 5학년이 되자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아홉 살 많은 둘째 형(이창희 전 새한미디어 회장)과 함께 하숙을 하면서 혼자 몰입하는 습관이 생겼다. 3년 동안 영화 1300여 편을 봤다. 그는 주인공의 입장에서, 조연과 감독의 입장에서 영화를 여러 번 반복해 보면서 경영에 필요한 ‘입체적 사고를 키웠다’고 술회한다.

미국 조지워싱턴대 유학 중엔 1년 반 동안 차를 여섯 번 바꿨다.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고 싶어 죄다 뜯어봐야했다. 전자제품도 수없이 가져다 분해했다. 이런 습관은 경영자가 된 뒤에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세계 1등 기업의 제품을 분해하고 삼성 제품과 비교하는 선진제품 비교 전시회를 1990년대부터 매년 열었다. 이런 채찍질은 삼성을 세계 최고의 기업 반열에 끌어 올리는 원동력이 됐다.

● 인내 뒤에 얻은 승리

이 회장은 오래 참았다. 이병철 창업주는 성격이 사교적이지 못한 그가 1966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오자 “골치 아픈 건 니가 할 것 뭐 있노”라며 동양방송을 맡긴다. 하지만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인한 시련을 겪고 전자 사업에 진출하면서 이병철의 생각은 바뀌었다. 잠시 그룹 총수를 맡겼던 장남 맹희 씨를 못 미더워 했다. 둘째 창희 씨는 삼성의 비리를 청와대에 밀고했다는 이유로 이미 눈 밖에 나 있었다.

1976년 34세의 이 회장이 후계자로 지목됐다. 하지만 ‘이건희 시대’는 쉽게 열리지 않았다. 1987년 이병철 창업주가 세상을 떠나고 회장에 추대된 뒤로도 곧바로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 회사 대신 승지원에 은둔하는 그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정서가 강했다. 온갖 루머가 흔들어 댔다.

1993년 비로소 칼을 뽑았다. 미국의 한 가전매장에서 구석에 처박힌 삼성전자 제품을 발견한 것이 발단이었다. 미국, 일본으로 경영진을 불러 질타했다. 불량 부품을 칼로 깎아 대충 조립하는 영상 등 회사의 민낯을 끄집어냈다. 이 회장은 전자사업의 성공으로 국내 재계 1위에 올라서며 자만에 빠진 경영진을 야멸차게 몰아붙였다.

그해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에 경영진을 모아 놓고 연 회의,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정점을 찍었다.

“불량은 암입니다. 양 위주의 경영을 버리고 질 위주로 갑니다. 초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마누라와 자식을 빼고는 다 바꿔야 살아남습니다.”

이 말은 한국 사회 전체에 충격을 던졌다. 오전 7시에 출근하고 오후 4시에 퇴근하는 ‘7·4제’를 시행했고 수억 원 어치의 제품을 모두 태워버리는 불량제품 화형식을 열었다. 언론은 삼성의 개혁을 연일 뉴스로 다뤘다. ‘이건희 신드롬’이 불었다.

● 세계 초일류의 길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1993년), 플래시 메모리 세계 1위(2003년), TV 세계 1위(2006년), 스마트폰 세계 1위(2012년)…. 이 회장이 삼성그룹을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화려한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95년 야심 차게 진출한 자동차 사업에선 1년여 만에 4조 원에 가까운 손실을 냈다. 그 즈음 노태우 정권 정치자금 사건으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1999년 폐 림프암으로 수술을 받으면서 건강도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견제와 감시도 심해졌다. 2008년엔 차명계좌와 수천억 원대의 세금 포탈 혐의가 적발되면서 아들 이재용 부회장(당시 사장)과 함께 퇴진하는 수모를 겪었다. ‘삼성 X파일’ 사건으로 삼성의 치밀한 정관계 로비가 세상에 드러나기도 했다.

어려움을 겪었지만 2010년 경영에 복귀한 이 회장은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인텔, 모토로라, 노키아, 애플 등 세계 최고의 기업을 제치고 세계 1위에 오른 삼성을 “아직 멀었다”며 다그쳤다.

눈에 띄게 약해진 몸 때문에 부축 없이 걷기 힘들었다. 2009년엔 7개월을 해외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일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자는 ‘마하경영’을 삼성에 주문했다.

몰입하는 경영자, 인내로 쟁취하는 경영자 이건희 회장. 그는 평생을 추구했던 초일류의 목표를 여전히 숙제로 남긴 채 역사에 이름을 새겼다.

김현수기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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