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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교복 입은 '아재'들이 경주에 모인 사연은? [오래 전 '이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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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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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인창고 제18회 동기생들이 2010년 10월17일 경주 대릉원 주변 녹지공간에서 옛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경주 신라문화원 제공


수학여행에서 입을 옷을 고르다 밤을 꼬박 보낸 경험, 있으신가요? 많은 분들이 ‘학창시절의 추억’ 하면 수학여행을 떠올릴 것 같습니다. 설렘 가득한 관광버스, “남는 건 사진이지~”라며 친구들과 관광지에서 찍는 사진들, 늦은 밤 숙소에서 터놓는 서로의 진심…. 올해는 아쉽게도 그런 추억을 남기기 어려웠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수학여행이 대부분 중단됐기 때문이죠.

떠나지 못했던 수학여행을 나중에라도 갈 수 있다면 어떨까요? 10년 전 경향신문에는 40년 만에 수학여행을 떠난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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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20일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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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주인공은 서울 인창고등학교 제18회 동기생 80여명. 어느덧 환갑을 바라볼 나이가 된 ‘아저씨’들이 교복을 입고 경주에 모였습니다. 군데군데 희끗해지기 시작한 머리와 새까만 옛 교복이 썩 잘 어울립니다. 수학여행의 ‘정석’인 경주에서 첨성대·불국사 등 문화유적을 둘러보고, 푸른 잔디밭에 둘러앉아 장기자랑도 합니다. 4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고딩’으로 돌아간 아재들의 유쾌한 수학여행을 기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자식보다 어린 진짜 고교 수학여행단 사이에 끼어 “나도 고딩”이라고 우겨 학생들의 폭소를 자아냈다. 휴식시간에는 동기생들끼리 풀밭에 빙 둘러앉아 ‘흘러간 옛노래’에 맞춰 춤을 추기도 했다. 당시에 유행하던 이른바 ‘다이아몬드 스텝’을 밟다가 다리에 힘이 없어 풀썩 주저앉는 모습에 박장대소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기사에 따르면 이들의 수학여행은 꽤나 ‘본격적’이었습니다. 잠들기 전 숙소에는 완장을 두른 선도반 학생들이 객실을 돌았답니다. 이른바 ‘단속반’이죠. 몰래 술을 마시거나 화투를 치던 ‘보통 학생’들은 “한 번만 봐 달라”며 싹싹 빌기까지 했다니, 수학여행 숙소에서 벌어지는 일탈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이 아저씨들은 왜 늦은 수학여행을 나서게 됐을까요? 그 배경엔 안타까운 사고가 있습니다. 이들이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70년 10월17일, 수학여행을 떠나는 인창고 학생들을 태운 기차가 강원도 원주 인근 한 터널에서 마주오던 화물열차와 정면 충돌했습니다. 신호기 고장으로 신호체계가 엇갈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열차엔 인창고 학생들을 비롯해 보인상고와 보성여고 학생들까지 700여명의 학생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앞 열차에 탔던 인창고 학생들의 피해가 컸습니다. 이 사고로 교사 2명과 사진사 1명, 학생 10명, 검표원 1명이 목숨을 잃고 학생 49명이 부상당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수학여행을 떠난 분들도 40년 전 친구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씁쓸해지기도 했습니다. 기사가 날 당시 동기회장이던 이원석씨는 경향신문에 “설레기도 했지만 옛 생각이 나서 착잡했어요. 당시 유명을 달리한 친구들과 선생님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이 ‘늦은 수학여행’은 학창시절 추억의 한 페이지를 늦게라도 채우기 위한 여행임과 동시에, 먼저 떠난 친구들을 마음 속 깊이 애도하는 여행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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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5년세월호 희생·생존 학생의 엄마들로 구성된 ‘4.16가족극단 노란리본’의 세 번째 연극 <장기자랑> 연습에 한창이다. 수학여행을 앞두고 반별 장기자랑을 준비하는 여고생들의 이야기다. 강윤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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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4년에도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학생 250명이 하늘로 떠났습니다. 당시 희생된 아이들의 어머니들은 극단 ‘노란리본’을 꾸려 수학여행 전 장기자랑을 연습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직접 연기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딸이 떠나지 못한 수학여행을 무대에서나마 대신 떠나주는 그 마음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요. 아이들에게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 ‘당연한 일’은 왜 이렇게 어렵고 오래 걸릴까요.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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