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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여적]랜선 야학(夜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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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경향신문

멘티 학생이 KT 온라인 교육 플랫폼을 통해 멘토와 랜선 야학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 KT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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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의 장편 <외딴방>은 서울로 올라와 외딴방에 살며 구로공단 전자부품회사에 다니던 10대 소녀의 젊은 날을 그린 자전소설이다. 눈에 띄는 것은 야학 공부다. 작품 속 ‘나’는 공장에 다닌 지 1년 만에 산업체야간학교에 입학하지만 주산·부기 위주의 커리큘럼에 흥미를 잃고 방황한다. 그때 ‘나’를 붙잡아준 이는 최홍이 교사다. ‘나’의 글재주를 눈여겨본 그는 “주산은 안 놓아도 된다”며 소설 쓰기를 권한다. 이후 ‘나’는 최 교사가 건넨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필사하며 소설 습작에 들어간다. 야학은 신경숙을 소설가로 만든 ‘인큐베이터’였다.

1970~80년대는 ‘야학의 시대’였다. 당시 야학은 가난에 학업을 놓친 이들의 배움의 충전소였다. 종일 미싱 일과 잔업에 지친 청소년들은 늦을세라 작업복 차림으로 야학으로 달려갔다. 산업체야간학교처럼 규모가 큰 인가 야학도 있었지만 교회 야학, 미인가 야학이 더 많았다. 야학은 학력 취득을 위한 검정고시 야학, 노동자 권익을 위한 노동야학, 취미·문화활동을 지향하는 생활야학으로 나뉘지만 혼재된 경우가 더 많았다. 대학생이 되고 싶어 검정고시 야학 문을 두드린 김진숙(민주노총 지도위원)은 그곳에서 <전태일평전>을 읽고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야학은 밤에 운영하는 비정규교육 기관을 말한다. 일제강점 초기 ‘사설학술강습회’로 시작한 야학은 3·1운동 직후 실력양성운동이 일면서 전국으로 퍼졌다. 이후 한국전쟁기의 천막야학, 산업화 시기의 노동자 야학으로 이어지면서 야학은 한국 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다. 그러나 소득이 높아지고 의무교육이 고교로 확대되면서 청소년 야학은 사라지고 장애인·할머니 야학이 명맥을 잇고 있다.

서울시교육청과 KT가 이달부터 방과 후 학습 프로그램 ‘랜선 야학(夜學)’을 운영한다고 한다. 대학생 1명이 비대면 온라인 플랫폼을 이용해 중학생 3명의 학습을 지도하는 방식이다. 코로나 사태 장기화로 교육 격차가 심화되는 속에서 저소득층 학생의 학습공백을 줄이면서 대학생에게는 일자리까지 제공한다니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소환한 ‘온라인 야학’이 단절 위기에 놓인 100년 전통의 야학을 이어갈지도 지켜볼 일이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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