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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기억할 오늘] 복수심에 눈먼 공권력 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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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 북아일랜드 분쟁과 '길포드 4'
한국일보

테러 누명을 쓰고 수감됐다가 15년 만인 1989년 풀려난 '북아일랜드 분쟁'의 피해자 '길포드 포'. thejusticega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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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북아일랜드 분쟁은 1960년대 말 시작돼 1998년 벨파스트 협정으로 진정됐다. 저 분쟁의 쌍방이 아일랜드 민족주의자 군사조직 아일랜드 공화국군(IRA)과 영국군 및 지역 경찰대다. 하지만 극렬 테러는 주로 IRA의 급진분파인 'PIRA(IRA임시파)'가 주도했다.

본격 테러의 신호탄이라 할 만한 사건이 1974년 10월 5일 밤 잉글랜드 서리 주 길퍼드(Guildford)에서 일어났다. 술집 '호스 앤 그룸(Horce and Groom)'에서 터진 폭탄은 영국군 여군 2명 등 군인 네 명과 22세 노동자 한 명의 목숨을 앗았다. 약 30분 뒤 인근 'The Seven Stars'에서 두 번째 폭탄이 터졌지만, 1차 테러에 놀란 군인과 시민들이 대부분 자리를 떠 사망자는 없었다. 사망자 외에 모두 6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한달 뒤 영국은 '테러방지법' 을 제정, 48시간 임의구금 한도를 테러 용의자에 한해 7일로 연장했다. 고문 시간이 그만큼 늘어났다는 의미였다.

절도 등 자잘한 범죄를 일삼던 17~25세 청년 4명(여성 1명)이 용의자로 체포됐다. 그들은 구타와 고문 끝에 범행을 '자백'했고, 75년 10월 19일 살인 등 혐의로 전원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피의자 중 한 명이 사건 당시 런던에 머물렀다는 명백한 알리바이조차 무시됐다. 며칠 뒤 폭발물 운반 등 혐의로 맥과이어 일가 등 친지 7명도 체포돼 76년 3월 4~14년 형을 선고받았다. 52세의 패트릭 콘론은 4년 뒤 감옥에서 별세했다. 다른 테러로 체포된 PIRA 일당이 77년 길퍼드 테러를 자기들 짓이라고 자백했지만, 경찰과 사법 당국은 그 자백을 묵살했다.

1989년 두 사설탐정이 조사 끝에 길퍼드 테러 수사팀의 증거-자백 조작 사실을 밝혀냈다. 각각 '길퍼드 포(Four)'와 '맥과이어 세븐(seven)'이라 불린 그들은 15~16년 옥살이 끝에 89년 10월과 90년 7월 재심으로 풀려났고, 2005년 토니 블레어 수상이 공식 사죄했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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