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18 (월)

[박정진의 차맥(茶脈)] 〈56〉 조선 후기 선비 차인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조선 후기의 선비들은 당색은 다르지만 차를 즐기는 마음은 한결같았다. 서인(노론)과 남인은 서로 다른 다풍(茶風)으로 양대 산맥을 이루면서 차의 전통을 이어갔다. 벼슬살이할 때는 중국에서 들여온 좋은 차를 마셨지만 귀양살이할 때도 소박한 차로 차 생활을 이어갔다.

김장생의 문인이었던 이경석-이진망-이광덕으로 이어지는 가문도 빼어난 차시를 남긴 것을 보면 분명 훌륭한 다가(茶家)였을 것이다.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1595∼1671)은 조선왕실 덕천군(德泉君·2대 정종의 10번째 아들)의 6대손으로 김상헌과 함께 청나라와의 화친을 배척한 척화신(斥和臣)으로 청나라에 끌려가서 1년간 구금되었다. 돌아와서 영의정을 지냈으나 효종의 북벌계획이 김자점의 밀고로 드러나자 자신이 책임을 지고 다시 청나라에 감금된 인물이다.

이경석은 차를 좋아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강릉의 ‘한송정(寒松亭)’을 직접 찾아 시를 남겼다.

“신선들의 차 부뚜막 아직 남아 있고/ 차 달이던 샘물 지금도 솟아나네./ 오늘 한송정은 적막에 싸였는데/ 바다 위의 달빛은 변함없이 비추네.”(‘한송정’)

이경석은 이 밖에도 주옥같은 여러 편의 차시를 남겼다.

“개울에선 옥 구르는 물소리/ 꽁꽁 언 얼음 아래 그 소리 남았네./ 차 달여 마셔보니 옛 맛 그대로네./ 취한 술이 곧 깨어 한기가 스미네.”

“차 솥엔 솔밭 개울 달떠서 채우고/ 처마엔 골짜기 구름 빌려 왔다네./ 등 넝쿨 모자에 짚신 신고 오가는 곳은/ 낯익은 삼호(三湖)의 호수길.”

“한낮 창엔 나무그늘 시원하고/ 발 너머 연못에 스쳐 지나는 제비./ 병으로 오래 술 마시는 재미 잃어/ 때때로 한가하게 ‘다경’을 읽네./ 뜰 가득 솔바람소리 꿈에서도 좋고/ 차 연기 가늘게 피어 바람에 흔들리네.”

“다정에서 차 달일 때 솔밭에 눈 내리고/ 이른 나물 씹으니 메마른 땅에도 봄이 왔다네./ 정녕 같은 마음 가진 이에게 알려주고 싶네./ 골짜기 가득 연하가 아직 걷히지 않네.”

“종남산 부슬비 처마를 적시고/ 화악의 바람 찻잔에 머금었네./ 세속에서 산속 아취 겸할 수 없어/ 그대 불러 산옹과 같아지고 싶었다네.”

“갈증은 없애려 차 솥에 눈 끓이고/ 추위 막으려 술 몇 잔 들이켰네./ 소금장 안에 따뜻한 고마주가 있다면/ 대머리에 이 빠진 늙은이는 아닐 테지.”

도운(陶雲) 이진망(李眞望·1672∼1737)은 이경석의 증손으로 영조의 잠저시절 사부로 지냈으며, 특히 귀양살이 후에 쓴 차시에 수작이 많다.

“고향을 떠난 게 얼마 만인가/ 돌아와 보니 봄풀이 돋아있네./ 흰 돌 위의 맑은 물 옛날 같고/ 책상과 차 화로에 먼지가 가득하네.”

“집에는 차 화로 약봉지 항상 있고/ 병은 봄 되어도 차도가 없네./ 늦게 찾아온 성 밖 형제들과 차 마시니/ 그 옛날 차 마시던 친구 생각나 외로워지네.”

Segye

조선의 선비들은 정자에서 연못의 꽃을 바라보면서 차를 즐겼다.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이석형(李石亨)의 5대손 이정구-이명한-이단상으로 이어지는 연안(延安)이씨 가문도 훌륭한 다가로 손색없다.

특히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1564∼1635)는 바둑의 대가로 이름이 높아서 기다일미(棋茶一味)를 실천한 인물로 보인다.

그는 광해군의 세자책봉에 골몰하던 장인 예조판서 권극지가 임진왜란 발발소식을 듣고 급서하자 급히 장례를 치르고 가묘를 쓴 뒤 왕을 쫓아갔다. 그는 명나라 사신 송응창(宋應昌)의 요청으로 경서(經書)를 강의하였으며, 전후에 자주 중국 사신들을 접대했다. 명나라 문인들의 요청으로 ‘조선 기행록’이란 책을 만들었다.

1598년 명나라 찬화주사 정응태가 ‘조선이 왜국을 유인해 명을 침략하려 한다’는 무고를 해, 명과 조선 사이에 긴장감이 돌았다. 조정은 오해를 풀기 위해 동인인 유성룡을 사신으로 추천했으나 고사하자 서인인 백사 이항복 정사와 함께 이정구를 부사 자격으로 명나라로 보냈다. 이때 그의 문장력이 빛났다.

그는 큰아들 이명한, 큰손자 이일상과 더불어 조선 최초의 3대 대제학이라는 ‘문형(文衡)의 길’을 닦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정구의 후손은 조선 말기까지 당상관 이상의 벼슬을 무수히 배출한 명문가였지만 삶은 항상 검소하고 질박했다. 이정구는 아들 명한·소한과 더불어 ‘동방의 삼소(三蘇)’라고 불릴 정도로 시문에 능했다고 한다. 소동파(蘇東坡)를 본뜬 말이다.

그는 특히 바둑을 좋아했다. 그가 남긴 바둑 시는 지금도 회자하고 있다.

“사방이 탁 트인 바람 부는 처마 밑에/ 한낮이 더디 가네./ 귤 속의 진짜 즐거움은 바둑 한판뿐이라네./ 신선이 바둑 한판 두는 동안/ 인간세상에서는 도끼자루 썩는다는데/ 뜰아래 구경하는 스님아/ 그대는 누구인가?”(坦腹風?午景遲/橘中眞樂一枰棋/ 人間歲月柯應爛/庭下山僧爾是誰)

Segye

경기 가평군 상면 태봉리에 있는 가평 3대 대제학 집안 이정구의 묘소. 그의 묘소 위에 아들인 이명한, 아래에 손자인 이일상의 묘가 있다.


이정구의 후손도 훌륭한 차시를 많이 남겼다. 그의 아들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1595∼1645)은 척화파로 청나라에 여러 차례 구금되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중국을 왕래한 관계로 차 문화에 익숙했다. 차와 바둑을 사랑한 집안답게 이명한의 차시에도 바둑이 등장한다.

“손님이 이르면 다만 기보(棋譜)를 평하고/ 몸이 한가로울 때 ‘다경’을 주석하네./ 어디선가 두드리는 소리 듣고 잠 깨니/ 산승이 시 쓰라고 기다리네.”

“대궐의 찬 우물물로 차 달이고/ 옥화로에 불 사위어 향을 피우네./ 그 시원함은 상소 올린 것과 같으니/ 신선의 무리들과 한바탕 취한 듯하네.”

“금반 위에 벼룻물 붓고/ 눈(雪)물로 차를 달이네./ 밤 깊어 장안은 고요한데/ 때마침 발 내리는 소리 들리네.”

“가는 눈 펑펑 내려 달빛 가리고/ 궁궐이 하도 넓어서 시간을 잊었네./ 시중드는 신하는 차 달이는 흥에 젖어/ 한밤의 정사당(政事堂)에서 시를 읊고 있다네.”

“은하수 처음 돌고 북두가 기울어지니/ 등불 그윽한 밤에 웃고 얘기하는 소리/ 햇차 사발 들이켜니 추위가 조금 가시는데/ 좋은 손님 못 가게 차를 권하네.”

“백 번이나 금단 연단하듯 기이함을/ 술집과 찻집이 당연하다 여기네/ 눈(雪)물로 차 달이는 도공(陶工)의 흥은 알건마는/ 봉창에서 홀로 차 마시는 때에는 미치지 못하네.”

“서석산 남쪽 고을/ 쓸쓸하기가 절간 같네./ 부슬비 속에 차 달이니/ 대 소리에 꽃이 진다네.”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1628∼1669)은 이명한의 아들로 역시 많은 차시를 남겼다. 학문도 높아서 문하에 김창협·김창흡·임영 등 큰 제자들을 두었다.

“쓸쓸한 석양에 나그네 돌아오니/ 옛날처럼 거문고와 책으로 한가롭다네./ 세속의 다단한 교유(交遊)는 심드렁하고/ 여생은 자연에 맡기고 살려하네./ 외진 마을 비 내리니 벼꽃 젖고/ 가을 깊어지니 먼 숲에 은은한 단풍드네./ 낚시하고 돌아오니 아무 일 없고/ 차 달이는 저녁까지 사립문은 닫혀있네.”

“고요 속에 책 읽으니 그 맛 더욱 좋고/ 문 닫고 혼자 앉아 차를 달인다네./ 대 그림자 진 곳으로 평상 옮기니 시는 더욱 깔끔하고/ 머리맡에 매화 두르니 꿈까지 향기롭네./ 몸 밖의 공명은 부질없고/ 세간의 복잡한 굽이굽이 극적이네./ 어이하면 다시 얻는 벼슬 떠날 수 있을까./ 세속의 한가운데라 바쁘기만 하네.”

“뇌문 향로의 향 피우니 옆은 노을처럼 흩어지고/ 잠깨어 밝은 창 앞에서 차를 달이네./ 해는 높이 솟은 집 사이로 간간이 보이고/ 작은 뜰의 꽃들은 봄볕에 진다네.”

이명한의 큰아들 이일상(李一相·1612∼1666)은 차인으로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대제학을 3대째 이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1659년에 대제학에 올라 ‘문형(文衡)의 집안’임을 세상에 알렸다. 역사상 3대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은 광산김씨의 김만기(金萬基)·김진규(金鎭圭)·김양택(金陽澤), 달성서씨의 서유신(徐有臣)·서영보(徐榮輔)·서기순(徐箕淳), 전주이씨의 이민서(李敏敍)·이관명(李觀命)·이휘지(李徽之) 등 네 집뿐이다.

임진왜란 때 진주목사로 대첩을 이끌었던 김시민(金時敏)의 손자 김득신(金得臣·1604∼1684)과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손자 김익회(金益熙·1610∼1656)도 훌륭한 차시를 남겼다. 조선의 선비 가운데는 비록 차시를 남기지 않은 사람이 많지만, 그들의 자손이 차시를 간헐적으로 남기는 것을 보면 집안대대로 차를 즐겼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김득신의 차시를 보자.

“남쪽 성에서 낮잠 깨니 산뜻하고/ 차 부뚜막엔 가는 연기 피어오르네./ 스님 만나 선가의 얘기 듣고/ 조사로부터 내려오는 밝은 도를 비로소 알겠네.”

“먼 데서 온 길손이 여관에 드니/ 앞개울에 비치던 해마저 기우는구나./ 강남의 술로써 근심 지우고/ 산승의 차로써 잠을 쫓는다네.”

“강을 건너 골짜기에 들었는데/ 이 선경 어찌 지난날에 보았으리./ 술이 없어도 흥이 일고/ 벗이 있어 시를 논한다네./ 가을 지나니 오동잎 쌓이고/ 저녁 가까우니 물소리 커지네./ 마침 목이 말라/ 산승에게 향차(香茶) 한 잔 부탁하네.”

“시는 명을 궁하게 하니 붓을 던지고/ 술은 사람을 상하게 하니 차를 마시네./ 지난날 벼슬한 것이 후회스럽고/ 세간의 명리하는 것 헛되도다.”

“봄이 오면 고을 원 세금독촉 빈번한데/ 술로 목이 마른 시객은 두어 잔 차 마시네./ 아침 내 무릎 안고 말없이 앉아서/ 모래 벌에 내린 따오기만 보네.”

김익희의 차시를 보자. 차를 끊이는 과정, 즉 덩이차를 부수는 것과 물 끓은 소리, 차 상태의 변화 등을 소상하게 시로 노래하고 있다.

“학원(壑源)의 정배(正焙)를 달이는 진귀함/ 새벽에 새로 길어온 물 맑기도 해라./ 달처럼 둥근 덩이 옥연에 갈아서/ 좋은 구름같이 다스려 은병에 넣네./ 아두(鵝頭)로 점다(點茶)하니 유화가 일고/ 게눈 올라 물 끓으며 소리를 내네./ 막힌 창자 녹여주고 잠도 안 오는데/ 산성 멀리 밤 알리는 쌀쌀한 소리.”

“마음에 드는 시구 얻으면 자주 붓 잡고/ 벼슬 않고 몸 편하니 글 쓰는 일 해야겠네./ 석양의 늙은이 속기(俗氣)가 아주 없어/ 새순 볶아 차 달이는 일 몇 번 지났던가.”

“세발노구 급히 씻어 푸른 차 달이니/ 강남의 풍류 호사스럽기도 하네./ 봉함을 떼니 접혀진 시편 더욱 반갑고/ 시사(詩思)가 드높아 일가를 이루었네./ 펄럭이는 편지에 차 싹이 함께 오니/ 먼 남쪽이 가깝게 느껴지네./ 소중한 때가 바로 세모(歲暮)이니/ 바다와 산 어느 곳인들 내 집 아니리오.”

김익희는 조선 예학을 집대성한 김장생의 손자이기에 차 생활 자체가 명품 차는 물론이고 여러 면에서 품격을 유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어릴 적부터 차 생활을 하였음인지 정배(正焙)와 외배(外焙), 은병에 유화(乳華)까지를 알고 있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공차(貢茶)를 담당했던 북원(北苑)의 차 가운데 정소(正所)에서 나는 것을 증갱(曾坑)으로 정배라고 하며, 증갱이 아닌 것은 사계(沙溪)로서 외배라고 하였다.

북원공차는 오대(五代) 민국 용계 원년(933년)에 설치되어 4개의 왕조 29명의 황제 458년 동안 지속되었으나 명(明) 홍무 24년(1391년) 홍무제 주원장에 의해 “공차로 인해 민폐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금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박정진 객원논설위원·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 세상을 보는 눈, 글로벌 미디어 세계일보 & Segye.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