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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아침을 열며]아무도 모르는 어른들의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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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초등학생 형제는 식사를 직접 해결해야 하는 날이 많았다. 생계를 잇느라 엄마는 형제를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다. 따로 돌봐줄 보호자도 없는 형제는 코로나19로 학교 급식도 못하게 되자 편의점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이 많았으리라.

경향신문

이명희 전국사회부장


어느 날 집에 불이 났다. 엄마가 집을 비운 사이 음식을 해먹다 일어난 사고였다. 심한 화상을 입은 형제는 아직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위기 징후는 있었다. 사고 전 세 차례 이웃 주민들의 아동학대 신고가 있었다. 신고가 처음 접수된 것은 2년 전. 엄마가 아이들만 남겨두고 집을 비우는 일이 잦고, 집 안 청소 상태도 불량하다는 신고였다. 아동학대 유형으로 보면 ‘방임’에 해당한다. 아동복지법상 ‘방임’은 ‘기본적인 의식주를 제공하지 않거나 불결한 환경에 아동을 방치하는 행위’, 즉 아동에게 필요한 돌봄이 이뤄지지 않고 방치되는 상태를 말한다.

주변 신고로 형제를 상담한 아동보호전문기관은 올해 5월 형제를 엄마에게서 분리해야 한다는 내용의 피해아동보호명령을 청구했고, 수사도 의뢰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엄마와 살고 싶다고 했고, 법원도 “격리보다는 상담을 받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해 분리는 이뤄지지 않았다. 코로나19 유행 탓에 상담도 미뤄진 사이 사고가 났다.

형제의 집은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초생활보장수급 대상 가정으로 엄마는 아이들만 집에 둔 채 일을 나가야 했고, 최근에는 이마저도 끊겨 일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인천 형제와 같은 아동방임 사례는 저소득·한부모가정에서 자주 발견된다. 보호자가 생계를 위해 자녀 돌봄을 뒷전으로 둘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빈곤’이 방임의 가장 큰 원인이 되는 것이다.

사고가 벌어진 뒤에야 세상은 또다시 소란을 떨었다. 언론도 가세했다. ‘라면 형제’라는 민망한 이름을 붙여가면서 말이다. 아무도 모른다. 엄마가 혼자서 아이들을 부양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10세·8세밖에 안 된 형제가 먹고 싶은 것 중 아동급식카드로 살 수 있는 품목을 고르느라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엄마를 향한 비난이 쏟아지자 한국한부모연합은 입장문을 냈다. 연합은 “어려운 환경에서 혼자 두 아이를 양육한다는 이유로 이 사건에서 책임이 없거나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아이를 양육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를 살펴봐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동학대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과정은 반복된다. 올해 6월 여행용 가방에 갇혔던 아이가 숨지고, 학대를 견디다 맨발로 집을 탈출한 아이가 잇따라 발견된 뒤에도 그랬다. 정부는 대책 마련을 지시했고, 여론의 엄벌 요구와 제도 개선 목소리도 이어졌다. 이 모든 과정에는 가해자에 대한 분노, 아이들을 방치하는 데 공범인 어른들의 부채의식이 뒤섞여 있다.

아동학대는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게이브리얼의 죽음: 누구의 책임인가?>는 8세 게이브리얼이 엄마와 그의 동거남에게 고문에 가까운 학대를 당하다 죽음에 이른 사건을 다룬시리즈다. 다큐멘터리는 사회가 게이브리얼을 죽음으로 몰고 간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은 변명한다. “감독관이 초과수당을 못 주니 야근을 하지 말라고 했다”, “사회복지사의 업무량이 너무 과도하여 일일이 다 챙길 수가 없다”. 아이를 모른 체한 이유는 차고 넘친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아이를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어쩌면 형제의 엄마도 한계에 부딪혔는지도 모른다. 해당 지자체에서는 이 가정이 한부모가정 지원 프로그램에 적극 참여했고, 문제가 없어 보였다고 했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어른들의 ‘거짓말’이 어디까지인지 지금은 알지 못한다.

그래도 아동보호 시스템은 조금씩 촘촘해지고 있다. 최근 국회에서 ‘한부모가족지원법 일부 개정법률안’이 통과됐다. 10월1일부터는 개정된 아동학대 특례법도 시행된다. 개정안은 ‘아동학대 전담공무원’을 두고 지자체가 직접 아동 학대 사건을 조사할 수 있도록 했다.

영국 아동학대 사건 피해자인 피터 코널리 추모비에 어른들이 새긴 문구는 “마침내 안전해지다(safe at last)”였다. 피터는 보호자에게 학대를 당해 생후 17개월에 숨을 거뒀다. 아동학대는 또 일어날 것이다. 시스템이 없어서가 아니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뿐이다.

이명희 전국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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