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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국민 총살됐는데 "김정은 생명존중"…분노 부른 靑 친서공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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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사살한 北 지도자가 생명존중 의지?

“대화 상대로서 김정은 이미지 관리 필요성”

친서 공개 후 여권에서 김정은 옹호 잇따라

대북 규탄 결의안까지 없던 일 분위기



청와대가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모(47)씨 피격 사건 이후인 지난 25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공개한 배경에는 비판 여론을 감수할 정치적 노림수가 깔려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친서 내용과 공개 시기를 놓고 논란이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도 김 위원장과의 대화 재개 명분을 쌓기 위해 이 같은 행보를 감행한 것 아니냐는 의미다.

청와대는 언뜻 친서 공개로 궁지에 몰린 모양새가 됐다. 친서를 주고받을 정도의 대북 채널이 가동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통신 채널이 끊겨 이씨 피격 상황 대응이 이뤄지지 못했다는 취지의 해명이 군색해졌기 때문이다.

청와대의 발표를 보면 지난 8일 문재인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먼저 친서를 보냈고, 김 위원장의 답장은 지난 12일 전달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때 활용된 건 ‘국정원-통일전선부’ 라인이었다고 한다. 이번 사건에 대한 김 위원장의 사과가 담긴 통지문도 해당 라인을 통해 전달됐다.

야권에선 “정상간 비공개 핫라인이 사건 전부터 이미 가동되고 있었다”며 “통신 채널을 통해 이씨를 살릴 시도조차 하지 않은 건 청와대의 직무유기나 다름없다”는 비판이 당연히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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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지난 25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주고받은 친서 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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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가 김 위원장의 생명존중 의지 등 논란의 구절을 그대로 담아 전문으로 친서를 공개한 점도 비판을 자초했다.

문 대통령은 친서에서 “국무위원장께서 재난의 현장들을 직접 찾아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위로하고, 피해복구를 가장 앞에서 헤쳐 나가고자 하는 모습을 깊은 공감으로 대하고 있다”며 “국무위원장님의 생명존중에 대한 강력한 의지에 경의를 표한다”고 강조했다.

친서 공개 배경과 관련,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북측에서 보내온 통지문을 공개한 이후 남북 정상간의 친서 교환 문제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커짐에 따라 문 대통령이 최근 주고받은 친서 내용도 있는 그대로 모두 알려드리도록 지시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씨가 북한군에게 사살된 이후 김 위원장의 생명존중 의지를 운운하는 친서 내용은 국민적 공분에 불을 붙일 만했다. 청와대가 관례를 어기면서까지 친서 전문을 굳이 공개함으로써 과하게 많은 정보를 노출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청와대가 갑자기 친서와 통지문 공개 카드를 꺼내 든 데는 다분히 의도가 있다고 보고 있다. 김 위원장을 ‘상식적이고 대화가 가능한 인물’로 만들어놓아야 할 필요성이 현재 대여 비난 여론의 부담보다 크다는 분석이다. 집권 후반기를 맞아 남북관계에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청와대의 압박감도 이번 결정에 한몫 한 것으로 분석된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 김 위원장을 ‘매드 맨(mad man·미친 사람)’으로 보는 인식이 이번 일로 더 굳어지면 앞으로 김 위원장을 대화 파트너로 대해야 하는 정부 입장에서도 득이 될 게 없다”고 분석했다. 신범철 한국전략문제연구소 외교안보센터장도 “정상적 남북관계를 이어가려는 의지가 김 위원장에게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친서 전문 공개가 가능했다”고 평가했다.


친서와 통지문 공개 후 정부·여당에서 김 위원장을 향한 긍정 평가가 잇따라 나온 것도 청와대의 이 같은 기조를 반영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지난 25일 재단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진행된 포럼에서 “김 위원장의 리더십 스타일이 그 이전과는 다르다”며 “내 느낌에 계몽군주 같다”고 말했다.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도 같은 포럼에서 “(남북관계에)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독재는 틀림없지만 잘 관리하면 대화 상대도 될 수 있고, 평화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는 식으로 인정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과거 북측의 태도에 비하면 상당한 정도의 변화인 것으로 보인다”고 했고, 민주당 소속 전해철 국회 정보위원장도 “표현 수위나 서술의 방법 등을 봤을 때 상당히 이례적이고, 진솔하게 사과하지 않았나 판단을 하고 있다. 쉽게 볼 것은 아니고 굉장히 의미를 갖게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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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이번 사건과 김 위원장을 분리해 바라보려는 접근법도 나타났다. 박지원 국정원장은 지난 25일 정보위에서 “(이씨 사살 사건 관련) 김 위원장이 사전에 보고를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했다.

김 위원장의 사과 표명 이후 여당이 대북 규탄 결의안 채택에 신중한 자세로 돌아선 점 역시 대화 파트너로서 김 위원장의 가치를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다.

여야는 28일 국회 본회의를 열어 대북 규탄 결의안을 처리하는 방안을 논의해 왔지만 국민의힘이 대정부 긴급 현안 질의도 함께 진행해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사실상 무산됐다. 이 과정에서 여당은 해당 문제를 정쟁화시키는 데 반대한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대북 규탄 결의안 채택 시 향후 김 위원장과의 대화 명분이 떨어지는 것을 우려했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박 교수는 “남북 관계는 기초적인 신뢰 속에서 진전이 이뤄져야 한다”며 “신뢰를 크게 흔드는 일들이 잇따라 벌어지는 데도 덮고 넘어가려는 태도를 보이는 건 진정한 남북관계 개선으로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신 센터장은 “남북 관계의 상황 관리 차원에서 친서가 공개됐지만, 생명존중 의지를 운운한 친서 내용이 오히려 반북 정서를 심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근평 기자 lee.keunp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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