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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 (목)

그리스·로마 연구는 끝나지 않았다 [책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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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경향신문

고전에 맞서며
메리 비어드 지음·강혜정 옮김
글항아리 | 648쪽 | 2만9000원

그리스 헤라클리온 박물관에는 크레타섬 크노소스 궁전에서 발굴된 프레스코 벽화 ‘백합 왕자’가 전시돼 있다. 선사시대 크레타 문명을 대표하는 유물 가운데 하나로 날렵하고 강렬한 실루엣, 백합과 깃털이 꽂힌 우아한 머리 장식이 눈길을 끈다. 그러나 이 벽화는 복원 초기 “ ‘보그’의 표지 모델 같다”는 악평을 받았다. 오늘날의 패션지를 떠올린다면 고개를 갸웃하게 되지만, ‘보그’ 표지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원전 2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선사시대 유적이 20세기 초반 유행한 아르데코 양식과 묘하게 닮았다는 비판이 일었다. ‘백합 왕자’를 비판한 20세기 초반의 영국 평론가 에빌런 워는 유적 발굴과 복원을 지휘한 아서 에번스에 대해선 “그곳에서 그는 궁전을 다시 짓고 있었다”고 꼬집었다.

현대의 상상력이 더해진 유적의 복원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일종의 ‘재창조’ 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까. 메리 비어드의 <고전에 맞서며>는 이런 문제를 포함해 그리스·로마 고전학의 현주소와 논쟁 지점을 짚은 책이다. 영국의 저명한 고전학자인 그가 영미권에서 출간된 고대 그리스·로마 관련 고전학 서적 가운데 31가지 주제에 맞는 책을 골라 평한 일종의 서평 모음집이다.

비어드는 책 첫 장에서 ‘유적의 건설자’로 불린 아서 에번스의 크노소스 발굴 현장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에번스는 선사시대 그리스 문명을 발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1899년 크레타섬의 케팔라 유적지 땅을 대량 매입해 거대한 크노소스 궁전 유적을 발굴하고 오늘날 우리가 보는 모습으로 재건했다. ‘미노스 문명’이란 명칭도 그가 직접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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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에 맞서며>는 그리스·로마 고전학의 현주소와 논쟁 지점을 흥미롭게 짚은 책이다. 크레타섬 크노소스 유적에서 발굴된 ‘백합 왕자’는 복원 과정의 오류로 ‘보그의 표지모델 같다’는 비판을 산 벽화다(오른쪽 사진). 르네상스 시대에 복원된 ‘라오콘 군상’은 팔이 위로 뻗은 형태로 1950년대 다시 복원돼 현재와는 다른 모습이다(왼쪽 사진). 글항아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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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타 문명 대표 유물 ‘백합 왕자’
현대적 상상력의 재창조품 눈총
복원품이 더 인기 ‘라오콘 군상’
31가지 주제로 고전학 현주소 짚어
“새 질문과 해답 찾는 현재진행형”

하지만 복원 과정에서 어이없는 오류도 있었는데, ‘재창조품’이란 비아냥을 산 ‘백합 왕자’ 외에도 벽화 ‘푸른 원숭이’가 대표적이다. 몇몇 조각만 발굴된 이 프레스코 벽화는 사프란 꽃을 따는 섬세한 소년의 모습으로 복원됐고, 소년은 곧이어 “순수함을 지닌 크노소스인의 완벽한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복원 후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림 속 원숭이 꼬리가 포착되면서 이 벽화는 사프란 들판에 있는 푸른 원숭이로 다시 복원된다. 발굴 초기부터 에번스의 “풍부한 상상력을 덧붙인 나름의 해석”은 두고두고 논란이 됐지만, 여전히 크노소스 유적지는 연 100만명이 찾을 정도로 인기를 누린다. 저자는 복원 후 100여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이곳을 찾는 방문객이 “수많은 엽서, 포스터, 박물관 기념품 등에 나오는 선사시대 크레타 문명의 상징물들이 기원전 2000년과는 간접적으로만 연결될 뿐 대체로 20세기 초반의 재창조품이라는 사실을 모른다”고 꼬집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워낙 매력적으로 복원해 놓은 까닭에 ‘진짜’가 발견됐는데도 진품보다 복원품이 더 사랑받는 경우도 있다. 바티칸 박물관이 소장한 ‘라오콘의 군상’이 대표적인데, 이 조각상은 1506년 발견 당시 세 인물의 오른팔이 모두 소실된 상태였다. 사라진 팔을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를 놓고 미켈란젤로, 라파엘 등 당대의 예술가들이 치열한 논쟁을 벌였고 팔은 위로 뻗은 모습으로 복원된다. 이후 ‘라오콘의 군상’은 고통에 신음하는 인간 군상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20세기 초반 반전이 있었는데, 1906년 독일 고고학자 루트비히 폴라크가 로마의 어느 석공 작업장에서 근육 모양이 ‘라오콘의 군상’과 비슷한 대리석 팔을 발견한 것이다. 폴라크는 이 팔 조각을 바티칸 박물관에 기증했고, 박물관은 반세기 가까이 창고에 보관하다가 1950년대에 이르러서야 이 팔을 ‘진품’이라고 결론냈다. 그리고 조각상을 해체해 예전 복원 부위를 제거한 뒤 새 팔을 붙였다. 이 복원에 대해선 지금도 학자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이런 우여곡절에도 대중은 새로 복원된 조각상보다 위로 뻗은 르네상스 시대 복원품을 더 사랑했다.

높이 3m가 넘는 거대한 조각상 ‘파르네제 헤라클레스’도 복원 후 몇년 뒤 ‘진품’ 다리가 나타났지만 많은 이들이 미켈란젤로의 제자 델라 포르타가 복원한 ‘가짜’를 더 선호해 지금도 ‘진품’ 옆에 전시되고 있다. 저자는 “최근 학계는 이런 복원 작품 자체의 가치를 사뭇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라며 “여러 후대 예술가의 개입을 현재도 진행 중인 고전시대 조각 창조사의 중요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추세”라고 말한다. 일종의 ‘창조적인 재창조’로 본 것이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저자는 고대 연구가 ‘현재진행형’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책에는 ‘전통, 모험, 혁신의 그리스 로마 읽기’라는 부제가 붙었다. 고전과 고전학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과거에서 멈춘 채 현재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관점에서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해답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아서 에번스의 복원이나 난해하기로 유명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번역 논란 등 고전 해석에 대한 여러 오류를 지적하면서도 고전학을 연구하는 것은 ‘일종의 대화에 참여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는 문헌과 유적 등 과거의 유산, 이미 오래전 무덤 속으로 들어간 고대인들과의 대화뿐만 아니라 우리보다 앞서 ‘고전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온 사람들’, 즉 고전에 대한 ‘재창조 작업’을 해온 이들과의 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책은 “고전 세계를 둘러보는 일종의 가이드 딸린 여행기”다. 로마인은 왜 대대적인 ‘노예 해방’을 했는지, 그리스인은 어떤 때 웃었는지 등 현대 학계의 흥미로운 연구와 논쟁도 살핀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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