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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 51만원 가정부, 싱가포르 백만장자와 싸워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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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도범 몰린 가정부, 싱가포르 항소심서 무죄 판결

BBC “다윗과 골리앗 싸움… 사법 공정성 믿음 뒤흔든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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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 리야니(오른쪽)와 그의 변호사인 아닐 밸챈대니의 모습. 네모 안은 리우 문 롱의 사진이다. /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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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자유를 얻어 매우 기쁩니다. 4년간 싸웠습니다.”

인도네시아계 가정부 파르티 리야니(Parti Liyani·46)는 그녀의 고용주인 싱가포르의 백만장자 리우 문 롱(Liew Mun Leong·74) 전 창이공항그룹(CAG) 회장 일가와 4년간 법정 싸움을 벌인 끝에 이달 초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리우는 일가 가정부로 일하던 리야니를 고급 핸드백, 전자제품, 명품 시계 등을 훔친 절도범으로 몰았다.

23일(현지 시각) 영국 BBC방송, 싱가포르 스트레이츠타임즈 등에 따르면 싱가포르 고등법원은 지난 10일 절도 등 혐의로 기소된 리야니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리야니는 지난 2016년 3월 리우 아들인 칼 리우(Karl Liew)의 집에서 고급 핸드백, DVD 플레이어, 고급 시계, 의류 115벌 등 3만4000싱가포르달러(약 2900만원)어치의 물품을 훔쳤다는 혐의로 리우 일가로부터 고소 당했다. 앞서 지난해 1심 재판부는 혐의를 인정하며 그녀에게 징역 2년2월의 중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이번 항소심 재판부는 리우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결국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BBC는 리야니가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으면서 제기된 수많은 의혹들이 싱가포르 사법 공정성에 대한 의문을 촉발시켰다고 보도했다.

◇해고 통보에 “불법 신고” 맞서자 “고급 시계·핸드백 훔쳤다” 고소

현지 언론에 따르면 리야니는 지난 2007년 월 급여 600싱가포르달러(약 51만원)에 리우 일가 가정부로 취업해 2016년까지 일했다. 2016년 3월 리우의 아들 칼이 결혼 이후 분가를 하면서 리야니는 칼의 집으로 갔다. 그러나 몇 달 뒤 리야니는 칼로부터 돌연 해고 통보를 받았다. 재판에 기록된 문서에 따르면, 리야니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내가 화장실 청소를 거부했기 때문에 칼은 화가 났었다”고 말했다.

해고 통보를 받은 리야니는 짐을 싸면서 “칼의 집을 청소하면서 내려진 불법적인 지시는 싱가포르 당국에 신고하겠다”고 칼에게 말했다. 리야니의 가족이 인도네시아로 배를 타고 돌아갈 때 그녀의 짐도 함께 보내기 위해서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2시간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당일 비행기를 타야했다.

리우 일가는 당일 리야니가 떠난 뒤 그녀의 짐을 뒤졌고 거기서 칼의 도난품들이 발견됐다며 그해 10월 30일 경찰에 리야니를 신고했다. 이어 5주 후 다른 일자리를 찾기 위해 싱가포르로 돌아온 리야니는 결국 경찰에 체포됐다. 그녀는 이주노동자 보호소에서 머무르며 이곳에서 재정지원을 받아 리우 일가의 형사고발에 대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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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계 가정부 파르티 리야니(왼쪽)와 그의 고용주 싱가포르의 백만장자 리우 문 롱. /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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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상한 아들 증언…“왜 여성 옷 있나" 추궁하자 “난 여장 좋아해”

항소심 재판부는 “리우 일가가 부적절한 동기를 가지고 그녀를 고소했다”면서 경찰·검찰·1심 재판부가 이 사건을 얼마나 부적절하게 처리했는지 지적했다. 앞서 지난해 1심 재판부는 리야니에게 유죄 취지로 징역 2년 2개월을 선고했었다.

항소심은 “리우 일가는 본가에서 아들 집으로 근무지를 변경하라는 지시가 불법이라는 걸 감추기 위해 리야니를 경찰에 고발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라며 “리야니가 훔쳤다고 주장하는 것들은 이미 고장나고 부서져 있던 물품들로, 이런 것들을 훔치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고 했다. 리야니의 짐에는 버튼이 없는 시계, 작동하지 않는 아이폰 2대, 고장난 DVD 플레이어 등이 들어 있었다. 리야니는 재판에서 “짐에는 내 소지품뿐만 아니라 버려진 물건, 내가 넣은 적 없는 물품들이 뒤섞여 있었다”고 말했다.

항소심은 아들 칼의 증언 신빙성도 의심했다. 칼은 리야니가 2002년 영국에서 산 분홍색의 칼(knife)을 훔쳤다고 주장했다. 알고보니 그 칼은 2002년 이전에 영국에서 생산된 적도 없는 제품이다. 또 칼이 도난 당했다고 주장하는 의류들 중에선 여성 의류도 있었다. 재판부가 칼에게 “왜 (남성인 당신이) 여성 의류를 소유하고 있었나”라고 묻자 칼은 “여장을 좋아한다”고 답했다. 이에 항소심은 “매우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또 항소심은 경찰 조사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경찰은 최초 고발장 접수 이후 약 5주동안 현장을 방문하지도 않았고, 인도네시아어를 쓰는 리야니에게 말레이어 통역자를 붙여줬다. 싱가포르 경영대 교수 유진 탄은 “경찰의 수사 과정이 매우 부적절했다”며 “1심은 사건 결과를 예단했으며 경찰과 검찰 수사의 부족한 부분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했다.

카시비스와나딴 샨무감 싱가포르 법무장관은 이번 사건에서의 경·검 조사에 대해 “뭔가 잘못됐다”고 과실을 인정했다.

◇ 父, 결국 테마섹 등 4개 회장직 사임… “다른 노동자엔 같은 짓 말라”

이 사건으로 리우 일가에 대한 공분이 확산하자 리우는 창이공항그룹, 투자회사 테마섹 등 4개의 회장직에서 사임했다. 리우는 성명에서 “고등법원의 결정을 존중하며 싱가포르 사법체계를 믿는다”면서도 “불법적인 일이라는 의혹이 있으면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시민의 의무”라고 했다. 아들 칼은 아무런 성명도 안 냈다.

BBC는 이 사건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비유하면서 많은 싱가포르인이 이번 사건을 부자와 엘리트 계층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자신들 기준대로 살아가는 전형적 사례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결과적으론 정의가 승리했으나 일부 싱가포르 사람들 사이에선 사법체계의 공정성에 대한 오랜 믿음이 흔들리는 계기가 됐다고 봤다.

리야니는 재판 이후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이제 4년동안 매달렸던 법적 싸움이 사라졌으니 인도네시아로 돌아가고 싶다”며 “나는 고용주를 용서한다. 대신 다른 노동자들에겐 똑같은 짓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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