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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김광일의 입] "이러지 말라고, 힘들다고 울부짖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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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어제 한 줌 재가 됐다. 그의 유해가 경남 창녕 고향으로 가고 있을 때 서울에서는 닷새 동안 침묵했던 피해 여성 측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박원순 전 시장의 유서가 이번 사건의 진실된 내용과 피해 여성에 대한 사과, 그 어느 것도 대답을 주지 못했다면, 피해 여성의 입장문은 상당한 울림이 있다. 소설가 정세랑 씨의 최근작 ‘시선으로부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가해였다." 고인은 피해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넘어서서 매우 치명적이고 회복하기 힘든 마지막 가해를 남기고 떠났다는 뜻이다. ‘고소인 입장문’ 전문(全文)은 이렇게 돼 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미련했습니다. 너무 후회스럽습니다. 맞습니다. 처음 그때 저는 소리 질렀어야 하고, 울부짖었어야 하고, 신고했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랬다면 지금의 제가 자책하지 않을 수 있을까, 수없이 후회했습니다. 긴 침묵의 시간, 홀로 많이 힘들고 아팠습니다. 더 좋은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꿉니다. 거대한 권력 앞에서 힘없고 약한 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공정하고 평등한 법의 보호를 받고 싶었습니다. 안전한 법정에서 그분을 향해 이러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습니다. 힘들다고 울부짖고 싶었습니다. 용서하고 싶었습니다. 법치국가 대한민국에서 법의 심판을 받고 인간적인 사과를 받고 싶었습니다. 용기를 내어 고소장을 접수하고 밤새 조사를 받은 날, 저의 존엄성을 해쳤던 분께서 스스로 인간의 존엄을 내려놓았습니다. 죽음, 두 글자는 제가 그토록 괴로웠던 시간에도 입에 담지 못한 단어입니다.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실망스럽습니다. 아직도 믿고 싶지 않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많은 분들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많이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50만 명이 넘는 국민들의 호소에도 바뀌지 않는 현실은 제가 그때 느꼈던 위력의 크기를 다시 한 번 느끼고 숨이 막히도록 합니다. 진실의 왜곡과 추측이 난무한 세상을 향해 두렵고 무거운 마음으로 펜을 들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하지만 저는 사람입니다. 저는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저와 제 가족의 고통의 일상과 안전을 온전히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폭력 범죄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은 앞으로 상당 기간 지속될 것 같다. 국민들의 의혹이 해소되지 못한 부분이 너무나 많고, 또한 고인은 갔지만 그 주변에 성폭력에 연루된 관련자들이 상당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오늘 핵심 쟁점은 다음 세 가지 정도다. 일단 피해 여성이 성폭력 사실을 서울지방경찰청에 고소했는데, 고소 사실과 고소장 내용을 누가 언제 얼마나 박 전 시장에게 알려주었는가 하는 점이다. 고소인을 상대로 수사하는 과정에서 고소장에 들어 있는 혐의를 피고소인에게 알려준다는 것은 자칫 증거인멸의 기회를 줄 수도 있기 때문에 불법적 소지가 많다고 본다. 이것은 공무상 기밀 누설에 해당한다.

이번 사건 피해 여성이 지난 8일 고소장을 접수했고, 이튿날인 9일 새벽까지 경찰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8일 밤부터 이미 관련 내용들이 박 전 시장 쪽으로 전달됐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박 전 시장이 측근들과 대책회의까지 했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해보면 금세 전체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내가 만약 서울경찰청장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경찰청 실무 수사책임자는 우리나라 최고 지도층 중에 한 사람인 박원순 서울시장이 성폭력 범죄 혐의로 피소 당해 고소장이 접수된 순간 곧바로 서울경찰청장에게 보고했을 것이고, 서울경찰청장은 곧바로 청와대 민정 라인 쪽에 보고했을 것이다. 이것은 거의 동시에 이뤄졌다고 보면 된다.

서울시는 서울에 있는 거의 모든 공공기관과 민간 기업에게 갑중의 갑이다. 여러 인·허가권을 쥐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련 예산과 민원을 처리할 수 있는 곳이다. 서울경찰청은 서울시장이 성폭력 범죄로 피소됐다는 것을 곧바로 서울시에 알렸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국민들은 묻고 싶은 것이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에게 고소 사실과 그 내용을 누설한 자가 청와대에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서울경찰청에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양쪽 모두 박 시장에게 알려주었는지 밝혀야 한다. 이것은 성폭력 피해 여성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수사를 방해하는 공무상 기밀 누설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피해 여성 측 기자회견에 따르면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지난 4년 동안 성폭력 범죄를 계속해왔는데, 그것은 안희정 전 충남지사, 오거돈 전 부사시장의 성폭력 사건이 한창 불거져 있을 때도 성추행을 멈추지 않고 지속했다는 뜻이다. 이것은 몇몇 좌파 집권 세력들이 언론과 서울시민과 국민을 정말 하찮고 우습게 알고 세상을 얕잡아 본 것은 아닌지 가슴이 답답하다. 우리가 흔히 좌파들의 이러한 행태에 대해 ‘내로남불’이라는 말을 쓰곤 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고 어떤 "집단적이고 추잡한 이중인격, 혹은 위선적 행동을 엿볼 수 있다"는 진단이 정확할 것이다. 카메라와 마이크 앞에서는 여성 인권을 부르짖고 몇 발자국 뒤에 있는 집무실 안의 비밀 침실에서는 여성 비서를 성추행하는 행위, 이것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작품에서 나타난 "분열된 자아"라고 봐야할지 전문가의 감정이 필요하다.

다음 쟁점은 피해자가 여럿일 개연성에 대해 조사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피해자는 없나 살펴봐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 현행법은 공공기관 민간기관 할 것 없이 성폭력을 신고하고 구제하는 부서를 지정하도록 돼 있다. 이번 사건의 피해 여성도 서울시에 줄곧 하소연해왔는데 묵살됐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피해자가 여럿일 가능성도 있고, 그리고 자의든 타의든 서울시 여러 사람이 어물쩍 덮으려 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사건은 박 전 시장의 자살을 끝으로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지을 수 없는 것이고, 당연히 추가 조사가 뒤따라야 하는 것이고, 또 서울시의 외부 기관이 진상 조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오늘 한국일보는 이런 1면 톱 제목을 붙였다. "추모의 시간이 가고 진실의 시간이 오나." 국민은 조금 더 확실한 것을 원한다. 진실의 시간이 올지 말지 궁금해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의 시간은 반드시 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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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김광일 논설위원이 단독으로 진행하는 유튜브 ‘김광일의 입’, 상단 화면을 눌러 감상하십시오.

[김광일의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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