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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연합시론] 박시장 공은 인정하되 '권력형 성범죄 의혹' 진상은 규명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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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고 박원순 서울시장이 극단적 선택을 하기 직전 그를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전직 비서 A씨의 법률대리인과 여성단체들이 13일 기자회견을 했다. 박 시장의 장례 당일 열린 기자회견 내용은 바로 직전에 치러진 영결식보다도 훨씬 더 무겁고, 침통하다. 고소인은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이 대신 읽은 입장문에서 극한의 고통을 털어놨다. 문장과 단어 하나하나에 깊은 상처와 회한이 담긴 듯했다. A씨는 "너무 후회스럽습니다. 처음 그때 소리 질러야 했고 울부짖어야 했고 신고했어야 마땅했습니다"라고 심경을 토로하고, 그랬다면 지금 자책하지 않을 수 있을까 수없이 후회한다고 했다. 또 "용기를 내어 고소장을 접수하고 밤새 조사를 받은 날, 저의 존엄성을 해쳤던 분께서 스스로 인간의 존엄을 내려놓았다"는 대목에서는 박 시장이 직접 사과 대신 '모두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남긴 채 용서할 기회조차 없이 세상을 등진 것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드러난다. 자신이 겪었다는 피해뿐 아니라 전혀 예상치 못한 박 시장의 죽음까지 겹치면서 가중된 충격은 감당하기 쉽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정확한 사실관계는 확인이 필요하지만, A씨 쪽은 비서직을 수행했던 4년 동안, 그리고 다른 부서로 발령 난 뒤까지도 지속해서 성추행 피해를 봤다고 주장한다. 장소는 시장실 사무공간과 집무실 내 침실 등이라는 게 A씨 쪽 주장이다. 견디다 못한 A씨가 성적 괴롭힘 피해를 호소하며 부서를 옮겨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박 시장에게서 모바일 메신저로 받은 문자와 사진을 동료 공무원이나 알고 지내던 기자 등에게 보여주기까지 했다는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박 시장의 사망 후 경찰의 경고에도 온·오프라인에서 이뤄지는 2차 가해도 좀처럼 멈출 줄 모른다. 현재 공무원으로 재직 중인 A씨에 대한 무차별적인 신상털이는 물론이고 일부에서는 박 시장의 사망을 A씨 탓으로 돌리는 주장도 서슴지 않는데 고소장이 제출된 만큼 신속한 수사로 추가 피해를 막아야 할 것이다.

비극적인 이번 사건을 두고 박 시장 지지 여부나 정치적 입장 등에 따라 입장차가 확연해 마치 '조국 사태' 때 두 쪽으로 갈린 진영 대결을 다시 보는 듯하다. 인권변호사와 시민운동가, 행정가로서 평생을 바친 박 시장의 업적을 평가하고 추모하자는 쪽과 성추행 논란을 부각하려는 쪽이 팽팽히 맞서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김해영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이 여당에서는 처음으로 사과 발언을 한 것을 두고 당내에서 인신공격에 가까운 비난이 잇따르는 현실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늦은 감이 있지만, 이해찬 민주당 대표가 오후에 "피해 호소 여성의 아픔에 위로를 표한다"고 사과하며 상황 수습에 나선 건 다행이다. 인터넷에는 여성 비서를 고용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미투' 운동 이후 직장이나 사회활동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뜻으로 쓰여온 '펜스 룰'을 지지하는 의견도 다시 등장했다. '굳이 여비서 쓸 필요가 없는데 아예 말 나오지 않게 이참에 남비서로 다 바꿨으면 좋겠다'는 인식은 성추행 의혹을 접하는 우리 사회의 시각과 여성에 대한 편견·차별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번 사건을 핑계 삼아 박 시장이 걸어온 삶과 공(功)까지 부정해선 안 되지만 되풀이되는 권력형 성범죄의 재발을 막으려면 철저한 진상조사를 통한 실체적 진실 규명이 불가피해 보인다. 경찰은 박 시장의 사망에 따라 통상적 관행대로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을 종결할 방침인데 사안의 중대성과 진실 규명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고려하면 서둘러 사건을 덮는 게 능사는 아닌 듯하다. 더구나 경찰은 고소장 접수 직후 수사상황을 피고소인 쪽에 전달했다는 의심까지 받는 상황이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들어 박 시장을 가해자라고 기정사실화하는 건 사자명예훼손에 해당한다는 주장도 나오는데 그런 얘기를 하려면 '피해자'의 고통을 먼저 헤아리는 게 도리가 아닐까 싶다. 박 시장이 이룬 사회적 업적이나 사망을 이유로 성추행 의혹에 대해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것은 A씨의 안쓰러운 절규다. "저와 제 가족의 고통의 일상과 안전을 온전히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외침은 너무나 당연하고도 소박한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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