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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금주의역사-7월13~19일] ‘300달러짜리 병역 면제비’ 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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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 7월13일 뉴욕에서 벌어진 병역 거부 폭동은 미국 역사상 이례적인 사건이다.

전쟁으로 건국해서 서부를 개척해온 미국인들이 총을 싫어한 흔적은 없어 지금도 총기금지를 전면적으로 내세운 정당은 없어서다.

뉴욕의 그 폭동도 총을 들기 싫어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정부가 새로 제정한 징병법이 부자들에게는 징병을 피할 수 있는 조항이 있어서였다.

군복무를 원하지 않으면 300달러의 면제비를 내거나 대리복무자를 입대시키면 된다는 조항이었다. 당시의 300달러는 큰돈이었고, 특히 뉴욕에 많았던 아일랜드 출신의 하층 노동자들에게는 까마득한 액수였다.

뉴욕의 빈민들에게는 원래부터 남북전쟁에 대한 거부반응이 있었다. 뉴욕은 북부지만 뉴욕 항구는 남부의 생산품을 운송하는 항구였으니 전쟁은 그들의 일자리를 위협한 셈이었다. 그 아일랜드인들도 총을 싫어하는 체질이 아니어서 총을 들었으나 그 대상이 남부군이 아니라 링컨의 군대였다. 그들은 “제퍼슨 데이비슨 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제퍼슨 데이비슨은 링컨의 대척점에 있는 남부의 대통령이었다.

이에 링컨은 게티즈버그 전장에서 병력을 빼내어 16일 폭동을 진압했다. 당시 링컨 정부가 내세운 300달러짜리 병역 면제비는 얼핏 보기처럼 추악한 것은 아니었다. 2년간이나 전쟁을 치르자 군인들은 제대를 하려 하고 재정도 궁핍해져 정부는 군인과 돈이 다 부족해서 그런 고육책을 쓴 것이었다. 그 규정으로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아버지들이 병역을 면제 받았다. 하지만 그들의 아들들은 얌체 병역 기피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용명을 날렸고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소아마비에 걸리기 전 상원의원으로 정치활동 중에 1차 대전이 일어나자 해군성 차관보로 활약하기도 했다.

양평(언론인)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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