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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이충걸의 세시반] 올리브와 홍어와 캐비아의 공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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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스무살 청년이 ‘이충걸의 세시반’을 먼저 읽고 그리다. 조정강 한국예술종합학교 애니메이션과 1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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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와 특권, 축복의 이미지를 즉각적으로 연상시키는 영어가 뭘까? 하버드? 페라리? 샤넬? 아니. 발음만 해도 상상 속 친구들을 만난 기쁨을 주는 것. 특별히 선출된 것. 명예의 집적체. 바로 캐비아다. 어떤 이름도 세상에서 제일 호사스럽고, 이천년 넘게 사랑받았으며, 셰익스피어와 라블레, 에벌린 워 같은 당대 작가들이 침 흘린 생선 알만 못하다. (경제적 측면으로 캐비아의 기쁨이 20년 무주택자의 아파트 청약 당첨이나 응접실을 밝히는 모네 그림보다 위인지는 따져봐야겠지만.) 그런데 캐비아보다 한술 더 뜨는 명사가 있다. 그 이름은 홍어.

뜻밖이겠지만 홍어와 캐비아는 무척 닮았다. 입천장 아래 풍미 가득한 폭발을 경험하는 순간이야말로 두 메뉴를 에워싼 야단법석의 이유이다. 실은 둘 다 좋을 때와 나쁠 때를 위한 음식이라는 것이다. 승리에 대한 보상이며 재난에 대한 위로랄까. 돈을 좀 벌었을 땐 넘치는 맛을 주고, 결혼의 열매 앞에선 모두를 도취시킨다. 파산 직전 마지막 반항의 제스처라면 한마디로 기막힌 맛이 나겠지.

무엇보다 함께 먹을 동반자를 정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캐비아와 홍어의 가치를 새삼 깨닫고 고마워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리스트에서 당장 빼야 한다. 제일 위험한 인간은 모든 음식에 케첩을 뿌려야 직성이 풀리는 부류. 그들은 불량 식품으로 식탐을 채우면 족할 것이다.

다른 공통점은 가치를 엄격하게 분류하는 기준이다. 홍어는 의심의 여지 없는 산지에서 나온 극강의 품질과 가공된 가오리라는 비웃음 사이에서, 캐비아는 다이아몬드 후려치는 가격과 연어처럼 알을 품은 어류에서 나왔을 뿐이라는 자조 사이에서 줄을 탄다. 아무튼 돼지갈비처럼 어디서나 먹을 수 있다면 입에 머금는 기쁨은 반의반도 안 될 것이다. 캐비아의 문제는, 이론적으론 며칠쯤 끄떡없지만 일단 뚜껑을 연 다음에는 바로 해치워야 한다는 점이다. 사소한 문제 같지만 그것에 따라 캐비아가 영광이 될지 실망이 될지가 결정된다. 그런데 홍어는 조금 다르다.

나는 모든 과학을 내 식대로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냉장고가 작동하는지, 홍어가 왜 맛있는지 설명할 수 없다는 것만 빼고. 누구는 독특한 ‘악취’라는 점에서 홍어를 치즈와 비교한다. 치즈에서 풍기는 여름철 발 냄새, 축축한 사랑의 냄새, 불쾌한 지하실 냄새…. 그러나 홍어는 더 원시적이다. 어른들은 30년 만에 꺼낸 신 김치도 먹을 줄 알아야 성인이 된다고 말했다. 내가 쑥갓과 당근을 안 먹고 돼지 창자와 장어를 혐오할 때도 그랬다. 궁극적으로는 홍어를 먹어야 하며, 종국엔 차의 기름처럼 생리적 필수품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사람들 눈이 언제 고약한 님프처럼 변하는지 그때 보았다. 짓궂은 얼굴은 처음 대하는 음식 앞에서 당황하는 초보자 앞에서 불을 뿜었다. 우리에게 어른의 기준은 병째 들이켜는 소주가 아니라 홍어의 국경 너머에 있었다.

스무살 때, 한남동 사는 이탈리아 가족의 점심 초대를 받았을 때도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이탈리아 주인은 말했다. 어른의 삶은 올리브를 좋아하면서 시작된다고. 그렇지만 솔직히 올리브는 싫었다. 대파처럼 싫었다. 올리브 가지가 평화의 상징이라 한들 나와 무관한 얘기. 개화된 환대는 조금 불편했다. 식전주는 너무 달달해서 나까지 설탕에 졸여진 듯했다. 스파게티는 내가 죽은 뒤에나 나올 것 같았다. 기다림을 대신할 수 있는 건 올리브뿐이었다. 올리브는 검은 바다에 뜬 기름처럼 빛이 났지만 그 비웃는 듯한 맛, 맛없는 오만이 싫었다. 주요리가 나올 때까지 나는 올리브를 입으로 가져가는 그 팔들의 궤적만 쳐다보았다.

가끔 처음 맛본 고대의 식재료가 생각났다. 그 뒤로 와인을 마시던 어느 저녁, 나는 악마의 작은 타원형 몸에 매료되었다. 와인보다 오래된 맛, 차가운 물만큼 친숙한 맛. 해열 진통제 한 줌 같은 맛. 나는 모든 올리브가 좋아졌다. 기름 얼룩을 잔뜩 남기는 올리브, 로마인처럼 그을린 올리브, 배달 피자에서 나온 올리브까지.

모든 맛은 탐색의 과정이 필요하다. 요리의 동굴 탐험가가 아니라면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식별하기란 정말 힘들다.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면 일관된 식습관이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어느 자리에선 충동적인 모험가가 되어 내장에 도전했다. 간이 그렇게 맛있는 부위였다니! 익힌 다음 차갑게 식힌 양의 혀와 신장을 안 먹었다면 얼마나 후회했을까. 나는 올리브를 처음 맛보았던 그때의 저주가 두고두고 고마웠다. 초기의 오해가 없다면 훗날의 키스가 완성되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배웠다. 올리브와 홍어는 성숙의 윤리 뒤에서 예상치 못한 탁월함을 맛보여 주었다는 것을.

한겨레

이충걸 ㅣ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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