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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사설]충격적이고 참담한 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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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경향신문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박원순 서울시장의 빈소가 마련되어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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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서울시장이 비극적으로 유명(幽明)을 달리했다. 여비서의 성폭력 고소 후 지난 9일 집을 나가 연락두절된 지 하루 만에 북악산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1000만 수도 서울을 이끌던 시장이 ‘미투(Me Too)’의 자장 속에서 초유의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인권·시민운동의 개척자로, 9년간의 최장수 서울시장으로 작지 않은 족적을 남기고 64년의 삶은 불명예스럽게 끝났다. 충격적이고, 책망·실망·애도가 교차한다.

박 시장은 “모든 분에게 죄송하다”는 유서를 남겼다. 그의 죽음이 여러 해석과 논란을 낳을 것을 예견하고, 다섯 줄의 짧은 유서를 ‘속죄’로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이 던진 충격파는 작지 않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실망감에 애도하지 않겠다는 사람, 그의 공적인 헌신과 성폭력 피소로 마친 삶을 분리해보려는 사람, 표상으로 삼던 시민운동가·진보정치인의 퇴장이 몰고올 열패감을 토로하는 사람이 이어졌다. 정치권은 말과 행사를 자제하고, 서울지하철 파업과 시의회 개원식은 연기됐다. “박원순마저~”를 곱씹는 침묵과 탄식과 갈등이 표출된 하루였다.

또다시 폭로된 ‘권력자의 성폭력’은 무참하다. 그를 고소한 여비서는 경찰에 신체 접촉과 SNS 메시지·사진으로 4~5년간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당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 치료와 회복을 위해 미흡한 사후조치 속에서 법의 심판을 구하기 위해 용기를 냈다고 했다. 박 시장은 1999년 ‘서울대 우조교 사건’을 변론해 첫 성희롱 승소 판결을 이끌고, 부천경찰서 성고문 피해자 권인숙씨를 변호했다. 서울시엔 성평등을 챙기는 ‘젠더특보’도 따로 뒀다. 여권 신장에 앞서고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한 시장이 여비서에겐 잘못된 성인지감수성을 보이고, 권력을 사유화한 것이다. 안희정·오거돈의 파국 후에도 왜 이런 일이 되풀이되는지 허망할 뿐이다. 수도 서울을 이끌던 대선주자가 속죄하며 선택한 죽음이 더 이상 권력형 성폭력이 잠복·수용될 수 없는 엄중한 세상이 됐다는 마지막 계고가 되길 바란다.

한국 사회에 기여한 ‘박원순의 삶’은 마땅히 돌아보고 기억해야 한다. 인권변호사로 민주화 여정에 투신한 박 시장은 1994년 참여연대 설립을 주도한 뒤 소액주주운동과 낙천낙선운동으로 시민운동의 새 길을 열었다. 그가 만든 아름다운재단과 희망제작소는 나눔·기부 문화를 확장시켰다. 2011년부터 이끈 서울시정에선 ‘결식 제로’를 선언하고, 남방큰돌고래 ‘제돌이’의 방류를 직권으로 결정했다. 그의 비극적 선택 후 외신은 “가장 공격적으로 코로나19와 싸운 도시가 서울이었다”고 평가했다. 서울에서부터 앞당겨보려 한 전국민고용보험제와 신중하게 지켜온 ‘그린벨트’, 현대차 한전사옥 개발 이익의 강남북 공유는 끝까지 매달린 현안이었다. 안전·인권·복지를 앞세운 그의 시정 철학은 지속되어야 한다.

그의 마지막 길은 ‘5일간의 서울특별시장(葬)’으로 치러진다. 11일엔 시민분향소도 문을 연다. 갑론을박이 있지만, “화장해서 부모님 산소에 뿌려달라”는 유언대로 소탈하고 조용한 장례가 됐으면 좋겠다. 미화하기 어려운 인생의 마침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세상에 남긴 유산은 폄훼하거나 가벼이 할 이유도 없다. 냉정히 공과를 기억하면 좋을 일이다. ‘공소권 없음’으로 끝날 성폭력 사건 피해자에겐 또다른 ‘2차 가해’가 없는 성숙한 사회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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