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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글로벌 포커스]‘과학 굴기’ 中, 인재 1만명에 손짓… 美 “기술 도둑 잡아라” 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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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사건으로 불붙은 美中 기술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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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6일(현지 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 연방 지방법원. 에드워드 다빌라 재판장은 중국 톈진(天津)대 교수인 장하오(張浩·41) 씨에게 징역 15년 형의 중형을 선고했다. 장 교수가 체포된 지 5년 만의 첫 판결이다. 미국 기업의 핵심 기술을 훔쳐 중국 정부와 군에 넘긴 사실이 인정된 것이다. 쉽게 말해 장 교수가 ‘산업 스파이’, 즉 간첩이라는 얘기다. 더욱 큰 문제는 미국이 장 교수의 행위가 중국 정부의 철저한 계획에 따라 진행된 것이라고 의심한다는 점이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중국이 2008년 시작한 해외 인재 유치 프로젝트 ‘천인계획(千人計劃)’이 주목받고 있다. 장 교수는 제12차 천인계획에 포함된 인물로 밝혀졌다. 당초 미중 갈등은 무역 문제에서 비롯됐지만 이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책임론, 홍콩 국가보안법 문제 등으로 이어지면서 미중 관계 전반으로 확대됐다. 사실상 신(新)냉전에 돌입했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특히 경제 분야에서는 핵심 기술을 둘러싼 수 싸움이 치열하다. 미국이 ‘위장 스파이 기업’으로 간주하는 화웨이를 둘러싼 갈등이 대표적이다. 미국은 첨단 분야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밝혔지만 미국은 사실상 미국의 기술을 훔치고 스파이를 양성하려는 계획으로 의심하고 있다. 최근 세계 각국에서 ‘중국 산업스파이 주의보’가 울린 가운데 천인계획을 둘러싼 미중 갈등을 되짚어 봤다.

○ 美 “中, 핵심 기술 조직적으로 빼내”

장하오 교수는 2015년 5월 16일 학회 참석차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를 방문했다가 LA 공항에서 긴급 체포됐다. 그는 자신이 수사 대상에 오른 사실도 몰랐다. 당시 미 법무부는 미국 첨단 업체에서 근무하다 중국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교수 3명 등 총 6명에 대해 ‘첨단 기술 스파이’ 혐의로 비밀리에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미 법무부는 “장 교수는 미국의 정보통신기술을 불법으로 취득하고 중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 미국 기업의 비밀을 중국 정부에 넘겼다”고 강조했다. 이들이 중국 정부의 철저한 계획에 따라 스파이 활동을 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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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교수와 함께 수사선상에 오른 팡웨이(龐偉·41), 천진핑(陳錦屛·46) 교수도 톈진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이들은 장 교수가 체포된 이후 자신들도 미국 당국에 체포될 것을 우려해 해외에 나가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 교수와 팡 교수는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다. 동갑인 둘은 같은 대학을 다니며 친하게 지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06년 학교를 졸업한 두 사람은 각각 매사추세츠주 워번의 ‘스카이워크스 솔루션’과 콜로라도 포트콜린스의 ‘어바고 테크놀로지’에 취업했다. 이 미국 기업들은 스마트폰과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등에 사용하는 FBAR 기술을 갖고 있는 회사다. FBAR는 휴대전화에서 원하는 주파수만 채택하고 나머지 주파수는 걸러내는 무선신호 선별 기술이다.

팡 교수는 2008년 장 교수보다 먼저 톈진대에 고용돼 대학과 합작으로 회사를 세웠다. 장 교수는 2009년 6월 회사를 떠나 톈진대로 자리를 옮겼다. 한데 장 교수는 교수가 되기 전까지 회사 핵심 기술의 세부 내용을 e메일로 팡 교수에게 보냈다는 게 미국 측의 주장이다.

이들은 이렇게 빼낸 FBAR 기술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미국과 중국에 특허를 냈다. 예전 회사의 기술을 훔친 것이다. 미국 기업들은 2011년 가을에야 자신들의 기술이 도난당한 사실을 알아챘다. 20년에 걸쳐 5000만 달러(당시 약 500억 원)를 들여 개발한 기술을 하루아침에 빼앗긴 것으로 미국 측은 보고 있다.

미국 언론들은 이 과정에서 중국 정부와 톈진대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2008년 톈진대 교직원과 교육부 관리들이 미국에서 일하던 장 교수 등과 만나 상의한 뒤 톈진대에 관련 회사와 연구소를 세우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빼돌린 기술을 바탕으로 만든 장비는 군사용으로도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톈진대에 세워진 ‘ROFS 마이크로시스템스’에서 생산된 기기가 군부대에도 판매된 것이다.

○ 중국 ‘천인계획’으로 인재 흡수

최근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 천인계획은 중국이 2008년부터 시작한 해외 고급 두뇌 및 석학 영입 프로젝트다. 과학기술 발전 등에 필요한 인재 2000여 명을 5∼10년 안에 육성하겠다는 것이 단기 목표였다. 노동력 대국인 중국이 장기적으로 미국을 제치고 과학기술 최강국이 되겠다는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중국인이 주 대상이지만 외국인도 포함된다.

중국은 계획 추진 4년 만에 목표를 뛰어넘어 4000여 명의 과학자를 유치했다. 이에 중국은 천인계획을 ‘만인(萬人)계획’으로 확대했다. 2022년까지 1만 명 유치를 목표로 삼았는데, 벌써 8000여 명을 끌어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중 1000명은 노벨상 수상자급 인재로 키운다는 야심 찬 계획도 세웠다.

단기간에 세계적 인재를 모은 비결은 특급 대우다. 고액 연봉은 기본. 최대 100만 위안(약 1억7000만 원)의 생활비를 주고 주택 의료서비스 등 혜택이 따르니 해마다 전 세계에서 수천 명의 응모자가 문을 두드린다.

안면인식 AI 기술로 유명한 스타트업 상탕커지(商湯科技·Sensetime)의 창업자 탕샤오어우(湯曉鷗)가 대표적 인물. 미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천인계획에 따라 귀국해 중국과학원 선전기술연구원 부원장을 맡았다. 신경과학계의 세계적 석학인 푸무밍(蒲慕明) 미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중국과학원 신경과학연구소장으로 영입됐다. 푸 소장은 1999년부터 미중 두 나라를 오가며 협력 연구를 했지만 2017년 미 시민권을 반납하고 귀국했다.

○ 미 상원 “천인계획 미국에 위험”

미국은 천인계획을 사실상 10년 이상 방치했다. 민간 분야에서 인력의 이동은 자유로운 현상이라는 자유시장경제의 기본 개념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중 무역 갈등이 격화하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과 ‘기술 전쟁’의 불씨를 댕기면서 천인계획의 위험성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지난해 11월 미 상원 상무위원회 감독조사소위는 105페이지 분량의 ‘천인계획 위험성’ 보고서를 공개했다. 조사위는 보고서를 통해 “2000년대 중반부터 중국이 미국에 있는 연구원들에게 급여와 연구기금, 실험실 등의 혜택을 제공하면서 정보를 빼갔다”면서 “미국 주요 대학 연구실을 포함해 기업들의 연구소가 모두 타깃이 됐다”고 주장했다. 한 연구원의 경우 천인계획에 따라 중국으로 빼간 기술 보고서와 차트가 3만 건이 넘는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보고서는 또 “중국은 천인계획을 통해 대놓고 인재를 빼가고 있지만, 미국 정부의 대응은 지나치게 늦었다”며 미국의 대응 실패를 꼬집었다. 실제 미 연방수사국(FBI)은 2018년 중반까지는 강력한 대응책을 내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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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양국 간 핵심 기술 쟁탈전에 연루된 인사들이 잇따라 법정에 섰다. 지난해 10월 장하오 중국 톈진대 교수가 법정에 들어가기 전에 몸수색을 받고 있다(위 사진). 멍완저우 화웨이 부회장이 5월 27일 송환 재판 출석을 위해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집을 나서고 있다(가운데 사진). 찰스 리버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1월 30일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연방법원을 나서고 있다. AP 뉴시스


이번 장하오 교수에 대한 유죄 판결은 미국 상원의 천인계획의 위험성 지적 이후 첫 판결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미국의 달라진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판결인 셈이다.

올 1월 미국 정부는 천인계획에 포섭된 찰스 리버 하버드대 화학·생물학과 교수를 체포하기도 했다. 리버 교수는 나노기술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이자 미 최고 과학자로 꼽힌다. 그동안 미국에서 중국과 은밀한 거래를 하다가 적발된 이들은 대부분 중국계였지만 리버 교수는 순수한 미국인이어서 충격이 더 컸다.

리버 교수 기소장에 따르면 그는 중국에서 경비 차원으로 매년 15만8000달러를 받았다. 월급으로 5만 달러를 따로 챙겼다. 중국 우한이공대에 연구소를 설립하는 명목으로 150만 달러도 지원받았다. 그는 우한이공대 이름으로 논문을 발표하고 특허도 등록하는 등 대리인 역할을 해왔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중국이 리버 교수의 전문성을 중국의 제조업 육성 프로젝트인 ‘중국제조 2025’에 활용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고 분석했다.

리버 교수처럼 미국 과학자가 외국 지원을 받는 행위 자체는 불법이 아니다. 하지만 미 정부의 지원을 받은 사람은 다른 외부 후원 명세를 반드시 공개해야 한다. 리버 교수는 미 연방정부에서도 상당한 돈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기소장에서 “리버 교수가 2018년 국방부 조사 당시 ‘천인계획 참여 요청을 받은 적이 없다’고 거짓 진술을 했다”고 밝혔다.

미 검찰은 중국 인민해방군 출신인 예옌칭 보스턴대 연구원도 기소했다. 그는 신분을 숨긴 채 미 로봇 및 컴퓨터과학 전문가들과 접촉해 이를 중국에 빼돌리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지난해 12월에는 한 중국계 암 연구자가 21개의 생물학 연구 시약들을 중국으로 밀반출하려다 보스턴공항에서 체포됐다.

○ ‘민군 융합’ 경계하는 미국

미국이 이처럼 민간의 움직임까지 철저히 감시하는 것은 중국이 ‘민군 융합’이라는 명분 아래 빼돌린 기술들을 군으로 흡수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 정부는 “천인계획은 모두 민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면서 정부 주도로 기술을 탈취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선을 그었다.

그러나 중국은 최근 중국군이 민군 융합을 강조하는 것은 숨기지 않고 있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무기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민간과 군의 협력을 강화하기로 한 것이다.

민군 융합 전략은 민간 기업과 국영 방산 기업들이 협력해 민간과 군사 분야에 모두 적용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자는 전략으로, 중국군의 현대화 전략과도 연결돼 있다. 민군 융합 전략은 중국의 장기적 발전을 추구하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핵심 비전으로,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돼 왔다.

결국 민간 분야에서 천인계획을 통해 선제적으로 인력들을 빼간 뒤 일정 시간이 지나면 해당 기술을 군으로 이전하는 것이다. 천인계획과 민군 융합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셈이다. 장원기 전 삼성전자 사장이 중국 민간 기업에 부회장으로 스카우트됐다가 4개월 만에 그만둔 것도 이 같은 미국 측의 변화가 반영됐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중국의 천인계획이 미국에서 제동이 걸리면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기술 선진 국가들 사이에 인력 유출을 막기 위한 ‘기술 보호막’이 한층 더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는 군사 전용이 가능한 첨단 기술이 대학에서 해외로 유출되지 않도록 연구팀에 연구 개발을 지원할 때 외국 기업이나 조직으로부터 자금 협력을 받고 있는지 여부를 의무적으로 공개하도록 할 방침이다. 또 외국인 연구자 및 유학생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 이력 보고, 기술 유출 방지책 정비를 자금 지원 조건으로 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미국과 일본이 이처럼 중국의 천인계획을 경계하면서 대학 연구소 등에서부터 기술 유출 방지 대책을 세우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별다른 대책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대학이나 기업들이 알아서 대책을 세우는 정도다. 이렇게 되면 미국·일본 정부와 대학이 한국과 공동 연구나 기술 협력을 꺼릴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베이징=김기용 특파원 k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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