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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외딴섬에 법인만 2만여개…범죄영화 뺨치는 `돈세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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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세인트키츠네비스는 대서양과 카리브해가 만나는 곳에 있는 작은 섬이다. 뉴욕 맨해튼보다 조금 큰 국토에 인구 1만1000여 명이 산다. 1983년 영국에서 독립했을 때만 해도 먹고살 걱정을 하던 이 섬나라에 현재 법인 1만8000여 개가 들어서 있다. 비결은 조세 피난처다. 법인 소유주를 알릴 필요가 없는 이곳 시민권을 구입한 자산가가 급증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정부의 조세망이 강력해질수록 돈세탁 방법은 더 교묘해지고 치밀해진다. 아프리카 후진국에 거액을 주고 외교관 신분증을 발급받아 이중국적으로 조세를 회피하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중국 공산당 최고위층 인사는 일본 대리모를 통해 출산한 자녀에게 일본 국적을 취득시켜 자산을 우회상속까지 할 정도다.

웨일스 출신의 언론인 올리버 벌로(43)의 저서 '머니랜드'는 세계 곳곳의 조세 회피, 탈세, 돈세탁 수법을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벌로의 취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선거대책본부장이었던 폴 매너포트의 '러시아 게이트'에서 시작된다. 매너포트는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 같은 부패한 지도자를 고객으로 두고 미국 정부에 로비하면서 수천만 달러를 받아 조세당국과 은행을 속이다 들통났다. 벌로는 "매너포트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부자와 권력자의 비밀을 숨겨줌으로써 세계를 궁핍하게 만드는 시스템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슈퍼리치가 부정하게 얻은 부(富)를 은닉해두는 가상의 나라를 '머니랜드'로 규정하고 시스템의 실체를 추적한다. 세계 각국의 세법과 조세 조약은 달라서 어김없이 틈새가 존재한다. 검은돈은 법인세나 소득세가 낮은 곳, 본국 금융 규제를 피할 수 있는 곳 등을 찾아 역외(域外)로 몰려든다. 영국 본토보다 세율이 낮은 영국령 저지섬이 대표적인 조세 회피처다.

하지만 저자는 비난의 화살을 그들에게만 돌리지 않는다. 후진국의 도둑 정치가들이 자국에서 훔친 돈을 안전한 국가에 투자하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선진국의 최상급 은행가, 변호사, 회계사, 홍보 전문가, 로비스트 등이 조력한 것도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사상 최대의 자금 세탁 사건으로 불리는 '단스케 스캔들'만 봐도 그렇다. 2007년부터 2015년까지 9년간 2000억유로(약 273조원)에 달하는 러시아의 검은돈이 세탁된 곳이 바로 덴마크 최대 상업 은행인 단스케은행이었다.

저자는 머니랜드의 촉수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불평등을 심화하며, 민주주의를 잠식한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21세기 해적질이나 다름없는 탈세를 근절하고 세계를 다시 바로 세울 방법을 논의할 것을 촉구한다.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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