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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우리는 이미 미래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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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오릭스와 크레이크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민음사(2019)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이후 미래에 대해 말하지만 나는 자꾸만 코로나 이전을 생각해 보게 된다. 당시 우리들은 미래보다 ‘과거’에 정을 붙이고 살았다. 텔레비전에서는 옛 노래들이 이 프로그램 저 프로그램에서 절대 지겨울 리 없다는 듯 반복되고 있었다. 우리들이 꿈꾸는 환상적인 미래가 있다면 ‘부동산-미래’ ‘대박-미래’였을 것이다. ‘감염병-미래’나 ‘기후변화-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생각을 하는 사람 중에 맨부커상 수상자 마거릿 애트우드가 있었다. 그녀는 생명공학과 디지털 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했지만 그 사회의 배경은 ‘감염병’과 ‘기후변화’인 디스토피아 소설을 썼다.

디스토피아 3부작의 첫 권 <오릭스와 크레이크>는 소랑 양들이 불태워지는 걸로 시작한다. 어린 지미는 아버지에게 물어본다. “아빠, 동물들이 왜 불태워지는 거예요?” “질병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만약 내가 질병에 걸리면 나도 불태워지나요?” 지미의 부모는 싸움이 잦았다. 아버지는 인간에게 장기를 기증하기 위한 다중장기생산 돼지의 설계자였다. 인간과 동일한 조직을 가진 장기를 돼지 숙주 내부에서 배양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때쯤이면 한 번에 신장 대여섯개 정도를 생산하는 돼지구리를 완성해가는 중이었다. 아버지는 ‘과학자-비즈니스맨’으로 특권층이었다. 특권층은 보안회사의 삼엄한 경비 아래 평민층과 분리되어 살았고 특권층 사람들이 평민층이 사는 곳에 가려면 공기여과기를 코에 쓰고 혹시 모를 감염병에 대비해서 백신주사를 맞고 가야 했다.

아버지는 어느날 인간의 대뇌피질조직을 돼지구리 몸에 배양할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비난했다. “당신은 예전의 당신과 달라요. 예전의 당신에겐 이상이 있었어요. 모든 사람의 삶을 낫게 하겠다는. 하지만 돼지 두뇌연구는 생명의 기본요소를 방해하고 있어요. 비도덕적이고 신성모독적이에요.” 아버지는 말했다. “당신도 과학자였으면서 왜 그래. 생명에 성스러운 것은 없어. 그냥 단백질일 뿐이야.” 어느날 어머니가 집안의 컴퓨터 두 대를 망치로 때려부수고 용의주도하게 사라져버렸다. 시체보안회사 요원들이 지미를 심문했다. “어머니가 무슨 말 한 거 없니?” “무슨 말?” 어머니가 어려서 살던 집이 해수면 상승으로 다른 해변 집들과 함께 바닷물에 휩쓸려 가버린 이야기? 비가 내리지 않아 과일들이 건포도처럼 말라버린 이야기? 화재가 3주 동안 계속된 이야기?

그러나 다른 부모 역시 그런 것에 대해 한탄하곤 했다. “두려워하지 않고 세계 어느 곳이든 비행기로 여행할 수 있던 때가 기억나? 항상 진짜 불고기를 쓰던 햄버거 체인점 기억나? 오! 예전엔 모든 것이 정말 좋았지. 흑흑, 오늘은 섹스 안 해!” 나는 소설의 앞부분에 해당하는 여기까지를 ‘오늘은 섹스 안 해!’라는 제목으로 머릿속에 저장해뒀다. 제 아무리 정신이 아득해지는 쾌락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은커녕 해변의 집 한 채도 다시 살려낼 수 없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타협할 마음이 추호도 없었고 나도 마찬가지다. 나 같은 인간도 기적적으로 성스러워지는 이상한 순간이 있는데 그건 내 장기 어딘가의 통증을 느끼고 나도 언젠가는 죽겠지! 라는 생각을 할 때다. 그때는 타인을 위해서 내 생명까지도 걸 수 있을 것 같다.

헤어진 두 사람은 다른 길을 간다. 아버지는 순응의 길을, 어머니는 저항의 길을. 과연 어떤 저항이 감염병과 기후변화를 막고 부드럽고 뜨겁게 성욕을 자극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의 많은 부분은 이미 현실 속에 있다. 즉, 우리는 벌써 미래를 살고 있다. ‘감염병-미래’ ‘기후변화-미래’.

(시비에스) 피디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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