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9단'이란 별명의 박지원 전 의원(단국대 석좌교수)이 몇 년 전 언론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여의도 정치권에서 현역 국회의원을 지내다 낙선하면 그만큼 충격이 크다는 얘기다. 지역구의 중요 인사로 분주하게 활동하다가 한순간 정적과도 같은 고독이 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몸담았던 정당과 '연'이 희미해지는 게 태반이다. 그나마 진보정당에서는 낙선자와도 동지적 관계가 잘 이어지지만 보수정당에선 '끈끈함'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게 여의도 정가의 평가였다. 그런데 분위기가 최근 바뀌고 있다.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 체제가 들어서면서 낙선한 20대 의원들의 중용이 계속 이어졌다. 당의 살림을 책임지는 자리서부터 '총선 징비록 '집필과 싱크탱크 재건, 당의 리브랜딩 등을 모두 원외 전직 의원들에게 맡겼다. 떨어져서 사람도 아니라는 말은 옛말이 돼가는 셈이다.
김 위원장은 미래통합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장에 지상욱 전 의원을 임명했다. 지 원장은 30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에게서 얻는 데이터로 새로운 정치의 물결을 뒷받침하겠다"고 밝혔다. 공학도 출신인 그는 "실리콘밸리에서 수학하고 연구 생활한 경험을 바탕으로 과학적 데이터가 뒷받침되는 정책으로 국민에게 소구하겠다"고 말했다.
그의 경력을 눈여겨보고 임명한 김 위원장도 "데이터 정치, 정책적 선도로 창의적 대안을 제시해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김수민 전 의원은 홍보본부장에 임명됐다. 김 위원장은 "당명 개정을 포함해 당의 면모를 개선하는 데 주력해달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지 원장과 김 본부장의 인선은 당의 정책과 이미지 전략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에서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특이한 점은 두 전직 의원 모두 바른미래당에 몸담고 있다가 올해 초 미래통합당에 합류한 인사들이라는 점이다. 통합당의 전신인 자유한국당·새누리당에서 여연원장과 홍보본부장은 모두 당 대표의 측근인 동시에 최대 계파의 '허락'을 받아야 앉을 수 있었던 점에서 당의 '결'이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앞서 김 위원장은 서울 강북에서 분루를 삼킨 두 전직 의원을 자라에 앉혔다. 6월 초 원외인사가 된 재선 출신 김선동 전 의원은 사무총장에 임명됐다. 당의 근간인 조직과 재정을 총괄하는 사무총장에 원외 인사를 임명한 것은 이례적이다. 현역 의원 중심의 당 운영 기조를 탈피하려는 김 위원장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총선징비록'이 될 21대 총선 백서 집필의 수장에는 정양석 전 의원이 임명됐다. 당 관계자는 인선 배경에 대해 "당에 귀한 호남 자원이자, 사무처와 수도권 재선 의원을 지내 선거 관련 경험과 균형감각을 고루 갖춘 인사"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백서는 총선 실패의 원인을 규명하는 데 우선 초점을 맞출 전망이다. 3개월 이내 완성을 목표로 한다.
이외에도 통합당은 당의 최고의결기구인 비대위 멤버로 경기 고양정에서 석패한 김현아 전 의원을 배치했고, 일자리 의제를 논할 '미래산업일자리특별위원회'에는 송희경·김성태(비례대표) 전 의원이 원외위원으로 임명됐다.
통합당 관계자는 "21대 국회 의석수가 많이 줄어든 상황에서 지금까지의 국회 상황을 잘 알고 또 총선 패배를 생생히 절감한 인사들의 경험을 당 쇄신에 담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며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여당에서 전직 의원에 대한 예우는 또 다른 모습이다. 청와대나 행정부 요직을 불러 활동의 기회를 주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인사가 전현희 신임 국민권익위원장이다. 전 위원장은 18대에 비례대표로 처음 배지를 달았고, 20대 총선에선 서울 강남을에 입성하며 보수정당의 강남벨트를 끊어냈다.
21대 총선에선 통합당 박진 의원에게 패배해 여의도를 떠나게 됐다. 그러나 두 달 만에 장관급인 국민권익위원장에 발탁됐다. 김영란, 박은정 위원장에 이은 세 번째 여성 위원장이며, 정치인으로는 2대 위원장이었던 이재오 전 의원에 이어 2호다.
지난달 말에는 더불어민주당 20대 국회 비례대표 1번이었다가 21대 총선에선 서울 서초을에서 통합당 박성중 의원에게 패배한 박경미 전 의원이 청와대 교육비서관에 임명됐다. 박 의원은 5월 29일까지 20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가 이틀 뒤인 31일 곧바로 청와대로 이동했다. 의원 출신 비서관들은 당청이 공유하는 정책의 흐름을 잘 이해한다는 장점이 있는데, 청와대는 특히 교육 전문가로서 박 비서관의 능력을 높이 산 것으로 전해졌다.
이처럼 낙천 인사가 장차관급으로 이동하는 것은 여당 내에서는 이전에도 있었던 일이다. 20대 총선 직후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 김재원·강석훈 전 의원이 지역구 경선에서 패배하자 청와대 정무수석과 경제수석으로 갔다. 강석훈 경제수석은 공천 탈락 55일, 김재원 정무수석은 공천 탈락 81일 만에 각각 대통령 수석비서관으로 청와대에 입성했다. 공교롭게도 이때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이들 인사를 보은인사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김명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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