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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잡객들과 마실 때에는 꽁무니를 빼야한다 [명욱의 술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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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를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경우가 있다. 바로 7년간 전국이 일본에 의해 유린된 임진왜란(1592∼98년) 전과 후다. 임진왜란 후에는 조선 전기 200년 평화를 유지해 준 성리학에 대한 회의론이 일면서 실학사상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등장 시기는 광해군 시절(1608~1623년)부터로 본다. 특히 당시 차별받는 서얼들을 규합해 혁명을 일으키려고 했던 인물도 등장한다. 그가 바로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이다.

허균은 지금으로 비유하면 행정부 장관인 예조판서까지 역임한 인물이었지만, 이후 권력 다툼에 밀려 전라도 함열(지금의 익산)으로 귀양을 간다. 그때 지었던 대표적인 글이 우리나라 최초의 음식 평론서인 도문대작(屠門大嚼)이다. 유배지에서 나온 거친 음식이 힘들어 이전에 먹던 맛있는 음식을 생각하며 서술한 책이다. 도문(屠門)은 소나 돼지를 잡는 푸줏간의 문이며, 대작(大嚼)은 크게 씹는다는 뜻이다. 즉, 현재 먹을 수 없는 고기를 생각하며, 고깃집을 향해 입맛을 다신다는 의미가 된다. 단순히 고기만 기록하지 않았다. 과실, 고기, 어패류, 채소 등 총 117종의 식품과 식재료, 그리고 특산지와 재배 기원, 생산시기와 가공법, 모양과 맛까지 언급돼 있다. 말 그대로 종합 한식 해설서인 것이다.

세계일보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허균(왼쪽). 허균은 일찍이 자신의 책 ‘한정록’에 술을 즐기기 좋은 때와 피해야 할 때를 적어놓은 바 있다.


허균이 남긴 기록으로는 홍길동전 외에 한정록(閑情錄)이라는 책도 있다. 은거자의 정신적, 물질적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내용과 농사법에 대한 정보를 수록한 책이다. 흥미로운 건 애주가가 가져야 할 지침이 책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술을 마시는 데는 5가지 좋은 때가 있다. 시원한 달이 뜨고, 좋은 바람이 불고, 유쾌한 비가 오고, 시기에 맞는 눈이 내리는 때가 첫 번째로 맞는 일이며, 꽃이 피고 술이 익을 때가 둘째로 맞는 일이다. 우연한 계제에 술을 마시고 싶어하는 것이 세 번째 맞는 일이며, 조금 마셔도 흥이 난다면 네 번째요, 처음에는 울적하다가 다음에는 화창하여 담론이 활발해지는 것이 다섯 번째 맞는 일이다.”

화가 나고 속상할 때 과음을 하는 것이 아닌, 달과 바람, 비, 눈이 올 때가 술을 즐기기 좋은 때라는 자연친화적인 모습을 허균은 이야기했다. 책에는 술에 대한 절제와 애주가로서의 처세도 기록돼 있다.

“기뻐서 마실 때에는 절제가 있어야 하며, 피로해서 마실 때에는 조용해야 한다. 점잖은 자리에서 마실 때에는 소쇄한 풍도가 있어야 하며, 난잡한 자리에서는 규약이 있어야 한다. 처음 만난 사람과 마실 때에는 한가롭고 우아하게 하면서 진솔하게 마시되, 잡객들과 마실 때에는 꽁무니를 빼야 한다.”

허균은 일찍이 난잡한 자리에서는 규약이 필요하며, 잡객들과 마실 때에는 꽁무니를 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한국의 음주문화를 좀 더 멋지게 바꿔주지 않았을까, 아쉬움을 달래본다.

명욱 주류문화칼럼니스트&교수

● 명욱 주류문화 칼럼니스트는…

숙명여대 미식문화최고위 과정, 세종사이버대학교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객원교수. SBS팟캐스트 ‘말술남녀’, KBS 1라디오 ‘김성완의 시사夜’의 ‘불금의 교양학’에 출연 중.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 ‘말술남녀’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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