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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그림으로 세상을 따뜻하게”… 경영학자서 화가 후원자로 [나의 삶 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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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가협동조합 황의록 이사장 / 교수시절 ‘황혼의 꿈’으로 화가조합 생각 / 정년 퇴직후 2년의 준비 작업 거쳐 실행 / 화가·소비자·화랑 3자 ‘윈윈’ 모델 목표 / 조합화랑 3단계 심사 거친 작가 작품 전시 / 학력·배경 등 배제, 오로지 작품으로 선발 / “그림은 소유해본 사람만이 그 가치 알아 / 한 점 없는 집 많지만 한 점 있는 집 없어 / 화랑에 가다 보면 작품이 눈에 들어오고 / 세상이 달라 보이면서 행복해질 수 있어”

“요즘은 물질적인 삶은 나아졌지만 사회는 점점 병들어갑니다. 그 치유의 방법으로는 흔히 종교와 예술이 거론됩니다. 저는 예술, 그중에서도 그림에 주목했어요. 사무실이나 가정에 그림 한 점씩 걸려 있고 누구나 즐길 수 있다면 세상이 보다 따뜻해지지 않을까요. 경쟁력 측면에서도 예술이 필요합니다. 경영학자의 입장에서 예술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창조력을 지닌 기업과 조직만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위기를 넘기고 생존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모두가 말렸지만, 황혼의 꿈을 좇아 새로운 길을 가고 있어요. 창립 5주년이 되면서 조금씩 가능성이 보입니다. ”

세계일보

황의록 한국화가협동조합 이사장은 경영학자로 살면서도 인생 2막에 “돈이 안 된다”며 다들 만류하는데도 ‘그림을 통해 세상을 바꾸자’는 신념으로 화가조합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황 이사장은 인터뷰에서 “경영학의 예술현장 접목이라는 새로운 시도가 즐겁기만 하다”며 “작가들이 조금 더 나은 여건에서 작품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대중은 돈이 있든 없든 누구나 그림을 가까이하고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이 조합의 목표”라고 말했다. 서상배 선임기자


경영학 교수로 주요 대기업 경영 자문을 하다 정년 후 일반에 생소한 화가조합을 만들어 미술계에서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이가 한국화가협동조합 황의록(73) 이사장이다. 그는 2005년 작가와 후원자, 소비자를 연결해 어려운 화가의 안정적인 활동을 돕고 누구나 쉽게 그림을 감상하고 소유하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는 취지로 이 조합을 만들었다. 미술계 안팎에서는 그의 도전을 ‘경영학의 예술현장 접목’이라는 관점에서 예의 주시하고 있다. 초기에 무모한 도전이라 여겼던 이들이 요즘은 응원과 격려를 보내고 있다.

5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교대 근처 조합 사무실이 있는 갤러리쿱(Gallery Coop)을 찾았다. 일년 365일 문을 여는 이곳에서 황 이사장은 거의 매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상주한다. 명색이 이사장이지만 작품 설명도 하고 커피도 타고 청소도 하는 등 궂은일도 마다치 않는다. 그래도 지치지 않고 신이 난다. 그림을 통해 예술을 많은 이들의 삶 속에서 심는 일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일생을 경영학자로 살아온 그가 생소한 화가조합을 창립한 배경과 조합이 하는 일, 그간의 성과와 소회 등에 대해 들어봤다.

세계일보

-화가조합이 생소하다. 어떤 단체인가.

“교수 시절부터 화가조합을 생각해 왔다. 2013년 정년을 맞이한 후 2년의 준비작업 끝에 실행에 옮겼다. ‘그림 한 점으로 세상을 따뜻하게’라는 신념으로 만든 순수 민간 비영리단체다. 많은 이들이 그림에 매료돼 그림으로 행복해지면 그림 수요가 늘어나고 화가들의 삶은 저절로 좋아질 것이라 판단했다. 오랜 인연이 있는 몇몇 중소기업인과 전문직 종사자들을 규합해 결성했다. 엄격한 절차를 거쳐 화가들을 선발하고 조합원으로 영입했다. 화가조합은 작가들이 조금 더 나은 여건에서 작품활동에 전념할 수 있게 도와주고, 일반 대중이 그림을 가까이 접하고 즐길 수 있게 해 우리 사회를 밝게 하고 각자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일을 하고자 한다.”

-조합을 만든 계기가 있나. 운영 형태가 독특하다는데.

“미술에 관심을 갖다 보니 생각 이상으로 그림을 좋아하고 사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이들에게 “왜 (그림을) 안 사느냐?”고 물으니 불안감이란 답이 돌아왔다. 가격이 싸지 않은데 과연 이 그림이 괜찮은 그림인지 혹은 이 작가가 좋은 작가인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심할 수 있는 조합을 만들어 화가, 소비자, 화랑 3자가 ‘윈윈’하는 모델을 만들고 싶었다. 한 단계 나아가 많은 사람이 그림을 가까이하고 집에 한 점씩 걸 수 있다면 시장은 커지고 작가들의 삶도 여유로워지고, 우리 사회의 격도 한층 높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조합 화랑은 엄선된 작가만 전시할 수 있다. 창립 5년이 되면서 화가들의 신청이 크게 늘었지만, 전문가 블라인드 심사, 작업실 현장 심사, 그룹 초대전 공개 심사 등 3단계 심사를 거쳐야 한다. 최종 합격률은 2% 미만이다. 바늘구멍을 통과한 화가들은 우리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어준다. 특징은 블라인드 심사다. 작가의 학력이나 배경을 보지 않는다. 오로지 작품만 보고 선발한다. 매번 10명의 심사위원이 위촉되면 각자 자신의 집에서 작품 포트폴리오만을 보고 작가를 심사한다. 현재 그렇게 해 엄선한 소속 작가는 40명, 후원자는 55명(곳)이다.”

세계일보

-요즘 근황과 전시 활동은.

“얼마 전 ‘생애 첫 그림 선물전’을 잘 마쳤다. 코로나로 폐관하거나 문을 닫는 갤러리가 많은데도 우리는 40점 넘게 판매했다. 누구라도 부담 없이 그림 한 점을 소장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작품값을 100만원으로 정한 기획전이다. 실제 가치는 몇 배 더 있는 작품들이다. 그것도 버거운 구매자를 위해서는 할부도 해줬다. 함섭, 문선미, 차명주, 황미정, 신동권 작가 등의 작품이 국내외에서 판매됐다. 코로나로 갤러리를 방문하기 힘든 이도 많은 점을 감안해 제가 일일이 작품을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해 집중적으로 홍보한 것도 일정 효과를 거뒀다. 모두가 우리 작가와 작품에 대한 구매자의 신뢰가 있기에 가능했다. 그림은 가져본 사람만이 그 가치를 안다. 그림 한 점 없는 집이 수두룩하지만 한 점만 걸린 집은 없다. 소장하면 너무 행복하기 때문에 좋은 그림을 만나면 또 사게 된다. 19일부터는 ‘사진 찍는 의사’로 불리는 고려대 구로병원 김한겸 교수가 아프리카 의료봉사를 다니며 카메라에 담은 ‘노마드 인 아프리카전’을 할 계획이다.”

-장기 프로젝트로 예술 소외지역 그림기증사업도 시작했는데.

“지난달 7일 우리 조합이 강원도·강원교육청과 소외지역 초등학생의 예술 감수성 함양을 위한 작품기증사업 업무협약을 맺었다. 앞으로 3년간 강원도 내 초등학교 30곳에 우리 소속 화가들의 작품 690여점을 기증키로 했다. 어릴 적부터 예술작품을 가까이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미래 경쟁력을 키우는 일이다. 아이들이 그림을 좋아하면 부모도 좋아하게 되고, 사회도 긍정적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기대로 힘이 닿는 한 작품 기증을 이어갈 생각이다. 강원도 내 초등학교뿐 아니라 비무장지대(DMZ) 주변 초등학교 10곳, 내년에는 탄광 인근 10곳 등으로 확대한다.”

세계일보

-경영학 교수가 어쩌다 화가들을 돕게 됐나.

“경영학 교수로서 기업들에 미래 경영환경 예측이나 신사업에 대해 조언을 하다 보니 현장 공부를 많이 해야 했다. 여행도 많이 다니면서 새로운 것을 늘 익혔다. 아마 지구의 70%를 다녔을 것이다. 여행을 하다 보니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런데 사진을 전문적으로 공부해도 늘지 않았다. 사진이 마음에 안 들었다. 스트레스를 받아 친구인 프로 사진가에 고민을 털어놓으니 ‘사진 테크닉이 늘지 않으니 심미안을 키워보라. 그러려면 그림을 많이 보고 다녀라’라고 조언했다. 그때부터 전시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작가 소개를 받고 전시회도 다니고 뒤풀이 초대를 받으면서 교류의 폭을 넓혔다. 이들과 친해지면서 화가들의 삶이 너무 열악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가장 싼 집에 가서 가장 싼 걸 먹는데도 돈 낼 때가 되면 쭈뼛거리곤 했다. 주머니 사정이 나은 내가 몇 번 밥값을 냈더니 소문이 났다. ‘황 교수는 화가들의 후원자’라는 소문이 났다. 친구들이 수백명으로 늘어났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화가를 돕는 일을 시작했다.”

-조합 운영의 투명성과 개방성을 강조하는데.

“최근 한 시민단체의 논란에서 보듯 투명성을 통한 신뢰 확보가 어느 조직이든 중요하다. 우리 조합은 작은 단체이나 투명성과 개방성을 고수한다. 고문변호사도 있고, 자문 회계법인도 있다. 외부계약은 물론이고 작가들과 맺는 전시계약도 모두 고문변호사의 법률적 검토를 거친 표준계약서를 사용한다. 작품이 팔리면 반드시 기록을 남긴다. 철저하게 세금을 원천징수해 작가의 이름으로 국세청에 납부한다. 모든 자금의 흐름은 회계 담당자의 손을 거쳐 회계법인의 검토를 받는다. 당연히 매달 모든 비상근 임원들에게 공개하고 피드백을 받는다. 조합이 비영리단체이고,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도덕적 의심을 받게 되면 신뢰라는 기반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다.”

세계일보

-화가들의 해외답사도 지원하는데.

“매년 작가들의 해외답사를 전액 지원해 왔다. 재작년에는 24명이 지중해와 이탈리아를 돌았고, 지난해는 19명이 모로코와 스페인을 다녀왔다. 올해도 코로나가 변수이나 일단 하반기 남미 볼리비아와 페루, 멕시코를 다녀올 예정이다. 각자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답사하고 작품대상을 찾고 스케치를 한다. 이런 경험이 모두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작가들이 많이 보고 다녀야 사고의 틀을 깨는 좋은 작품의 영감을 얻을 수 있다. 단조롭게 매일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사람을 만나면서 영감을 얻기란 힘들다. 눈과 귀를 열어 사고의 틀을 깨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 경험은 작가의 무의식에 스미고 작품 위에 나타난다. 공짜가 아니다. 다녀온 뒤 전시회를 열고 작품을 팔아 경비를 충당한다. 작가는 후원자에게 그림으로 갚고, 후원자(기업)는 사내미술관에 작품을 건다.”

-평소 경영학자로서 ‘예술을 통한 경쟁력 제고’를 늘 얘기하는데..

“경영학 교수로 기업에 투자와 효율, 경쟁력 연구에만 매달려 왔다. 경쟁력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게 있다. 보이는 경쟁력의 시한은 겨우 6개월이다. 신제품이 나와도 경쟁사가 모방하고 베끼면 금방 따라잡힌다. 보이지 않는 경쟁력인 상상력과 창조력을 끌어내는 조직이 살아남는다. 그 원천이 예술이다. 예술이 밥 먹여 주냐고 하지만 실제 밥 먹여 준다. 페이스북·구글·애플·MS 같은 기업들은 화가들을 직원으로 왜 채용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기술과 예술은 경쟁력을 결정하는 양 날개다. 기업들이 예술에도 투자한다는 사실은 더는 이제 새롭지 않다. 4차 산업시대에는 예술의 영역이 더욱 확대된다. 예술적인 심미안이 중요하다. 가장 손쉬운 방법이 근처의 미술관이나 화랑을 찾는 일이다. 일상이 조금 불편하고 지겨울 때 예술과 함께 기분전환한다는 마음으로 우리 갤러리를 들러라. 일년 365일 언제나 수준 높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다 보면 작품이 눈이 들어오고 세상이 달라 보이고 행복해질 수 있다.”

박태해 선임기자 pth1228@segye.com

황 이사장은... △1948년 전북 남원 출생 △1973 고려대 심리학과 졸업 △1979 서울대대학원 경영학과 졸업 △1981∼1985 미국 오클라호마주립대 대학원 졸업(경영학 박사) △1987∼2013 아주대학교 경영대 교수 △1989∼1997 두산그룹 회장 자문교수 △1994∼1995 한국마케팅학회 부회장 △1995∼1996 한국소비자학회 회장 △2000∼2001 한국유통학회 회장 △2000∼2002 전국경제인연합회 유통분과 자문위원 △2002∼2007 LG전자, LG상사, LG화학 경영코치 △2004∼2005 아주대 기획처장 △2007∼2014 한국의농학회 회장 △2010∼현재 GS그룹 자문교수 △2014∼현재 아주대 명예교수 △2015∼현재 한국화가협동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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