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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화려한 조명이 감싸는 1일7깡… ‘밈’도 유효기간이 있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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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밈, 어떻게 태어나고 소멸하는가

MBC 토요일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의 한 장면. 개그맨 박명수가 바이오 제품을 선물 받고는 상대방에게 농담을 던진다. “가서 ‘날 좀 바이오’라고 하세요.” 박명수의 농담을 들은 상대가 웃지 않자, 제작진은 ‘웃음 사망꾼의 재림’이라는 자막과 함께 관을 들고 춤을 추는 흑인들의 영상을 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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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흑인들을 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밈(meme)을 좀 아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이들은 요즘 온라인상에서 '관짝소년단'으로 통하는 '관짝 밈'의 주인공이다.

발음하기도 낯선 단어 '밈'이 화제다. '이기적 유전자'를 쓴 리처드 도킨스가 보면 흐뭇해할지 모르겠다. 도킨스는 자신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최초로 이 단어를 사용했다. 그리스어 모방(mimeme)과 영어 유전자(gene)를 합한 말. 우리가 누군가를 모방하면 그 사람에게서 내게로 무언가가 전달된다. 그 무언가는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다. 거칠게 정의하면 이 무언가가 도킨스가 말하는 '밈'이다. '문화 전달의 단위' '모방의 단위'를 뜻한다.

대중문화계에서 '밈'은 그 의미가 조금 달라졌다.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특정한 문화 요소와 콘텐츠'를 뜻한다. 밈은 최근 온라인을 넘어서 TV·광고 등 주류 문화계까지 뒤흔들고 있다. 가수 비의 '1일 1깡', 배우 김응수의 '마포대교는 무너졌냐', 김영철의 '4딸라' 등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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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의 이번 리포트 주제도 '밈'이다. 관을 어깨에 들쳐 멘 흑인들은 2020년 어떻게 한국에서 '밈'으로 출연했을까.

'관짝소년단'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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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안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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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짝 밈'은 해외에서 먼저 유행하고 국내로 들어 온 '수입 밈'이다. 지난 2월 26일, 한 해외 누리꾼이 '틱톡'에 영상 하나를 올렸다. 틱톡은 15초짜리 짧은 동영상을 공유하는 소셜 미디어. 한 사람이 스키를 타다가 추락하기 직전의 상황에 놓이자, 관을 멘 흑인 5명이 등장해 흥겹게 춤을 춘다. 여기에 네덜란드 남성 듀오 바이스톤의 중독성 강한 EDM '아스트로노미아(Astronomia)'가 배경음악으로 깔린다.

사실 관을 메고 춤을 추는 건, 서아프리카 가나의 장례 풍습. 2017년 영국 BBC가 다큐멘터리로 이를 소개했다. 가나를 포함한 서아프리카에서는 엄숙한 분위기에서 장례를 치르는 대신, 호상인 경우 관을 어깨에 올린 채 밝고 쾌활한 분위기에서 춤을 추며 장례를 치른다. 국내에도 '춤추는 장례식'으로 소개돼, 화제를 모았다.

당시만 해도 색다른 풍습 정도로 여겨졌는데, 절묘하고 효과적인 편집과 함께 이들이 3년 만에 유머 코드로 재등장했다. 영상 편집자의 의도는 적중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나타나 관을 메고 춤추는 이들의 모습은 소위 '대박'이 났다. 틱톡, 유튜브 등 해외 누리꾼들을 중심으로 위기 상황에 이들의 모습을 갖다 붙인 패러디 영상이 쏟아졌다. 기출 문제에서 패러디한 '기출 변형' 버전도 있다. 정말 운 좋게 사고에서 살아남은 사람에게 예수가 나타나 춤을 추는 밈이다.

한 달 뒤인 지난 3월 말, 국내에도 '관짝 밈'이 상륙했다. 첫 상륙 지점은 '에펨코리아' '개드립넷' 등 국내 유머 커뮤니티 게시판. '외국에서 유행하는 장례 밈' '장례식 댄스' 등으로 처음 소개됐다.

샌드박스네트워크 김성하 PD는 국내에서 밈을 잘 활용하는 유튜브 편집자로 유명하다. 그가 편집을 맡았던 유튜브 '디스커버리채널 코리아'는 밈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구독자가 6개월 만에 300명에서 87만명으로 크게 늘었다. 김 PD는 "유튜브가 아예 밈을 창작하는 능력이 있다면, 관짝 밈처럼 외부에서 유행한 밈은 유머 커뮤니티에서 먼저 반응이 오는 경우가 많다"며 "국내 유명 유머 사이트들을 자주 탐독하며 어떤 밈이 유행하는지를 살펴본다"고 했다.

관짝 밈도 유머게시판을 거쳐 국내 유튜브로 퍼졌다. 영상을 본 누리꾼들이 '관짝 춤' '관짝소년단' 등의 댓글을 달면서, '관짝 밈'이 이름이 됐다. 사실 시체를 담는 궤를 뜻하는 표준어는 '관'이 맞는다. '관짝'은 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말. 낯짝, 등짝처럼 비하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짝을 더한 것으로 보인다. 확실한 건 '관 밈'보다는 '관짝 밈'이 더 입에 잘 붙는다는 것.

실제 누리꾼들의 '재치 있는 댓글'은 '밈' 흥행의 중요 요소다. 비의 1일 1깡도, 누리꾼들이 '시무 20조(팬들이 비에게 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한 20가지 행동)' '1일 3깡' 등의 댓글을 달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지난 4월 7일 인스타그램에 '관짝 밈'이라는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이 처음 게재됐다. 유머 커뮤니티, 유튜브 다음으로 '밈'이 유통되는 곳은 소셜미디어의 '유머 계정'이다.

'억지 밈'은 외면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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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영철(위)은 2002년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미군과 협상하며 ‘4딸라’만 외쳤다. 이 모습은 10여년 뒤 온라인에서 ‘김두한식 협상법’으로 불리는 밈이 됐다. 그는 이 대사를 패러디한 햄버거 광고도 찍었다. 가수 비가 2017년 발표한 ‘깡’도 밈으로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다. 하루 한 번 이 뮤직비디오를 감상한다는 ‘1일 1깡’이란 말까지 생겼다.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밈을 유행시킬 수 있을까.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 아니라 다분히 의도적으로 밈을 만들려고 하는 시도를 '억지 밈'이라고 한다. 실제로는 수요가 없는데도 억지로 공급을 계속 쏟아부어서 수요를 창출하려는 것인데, 대부분 실패한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대표적인 '억지 밈'으로 꼽는 것이 '엄준식'이다. 한 인터넷 방송에서 BJ가 자신의 본명을 가짜로 말했는데, 이후 우연히 방송을 통해 그 사람의 실명이 '엄준식'이란 게 알려졌다. 채팅 창에는 '엄준식'이란 글자가 도배됐다. 이를 해당 BJ가 금칙어로 정하자, 이번에는 '엄' '준' '식' 한 글자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를 재밌다고 여긴 사람들이, 다른 방송에서도 뜬금없이 '엄' '준' '식'을 쓰기 시작했다. 문제는 여기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이 없었다는 것.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다' '해당 방송을 아는 사람만 깔깔대는 억지 밈이다'라는 반응이 이어졌다. 결국 '엄준식'은 밈으로 자리 잡지도 못한 채, 억지 밈의 오명만 쓰게 됐다.

엔터 업계 관계자는 "'밈'의 경우 기존의 여러 마케팅 방법과 달리 관리가 되거나, 의도된 바대로 진행되는 판이 아니다"라면서 "'챌린지'나 '해시태그' 등을 이용한 소셜 미디어 마케팅을 진행하긴 하지만, 밈만큼은 대중들에게 '픽'을 당해야 반응이 있는 방식이라 기획사에서도 나설 수가 없다"고 했다.

성공한 밈에 잘못 숟가락을 얹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지난달 초 통계청은 비의 '깡' 뮤직비디오 유튜브 영상에 '통계청에서 '깡' 조사 나왔습니다. 2020년 5월 1일 10시 기준 뮤직비디오 조회 수 685만9592회. 39.831UBD입니다'라는 댓글을 남겼다. UBD는 비 주연의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의 흥행 실패를 조롱하면서 나온 말. 당시 영화 누적 관객 수인 17만2212명을 빗대, 1UBD를 17만2212로 표현한다. 통계청은 "국민과 가까이 소통하려는 마음이 앞섰다"고 해명했으나, 정부 공식 채널에서 밈 현상에 편승해 선을 넘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공중파 나가는 순간 사망 선고

밈에도 시작과 끝이 있다. 지난달 24일 한 유머게시판에는 '깡 놀이 공식 사망 선고'라는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지상파 뉴스에 나온 비의 1일 1깡 열풍 사진을 올리며 이렇게 썼다. "공중파 메인뉴스까지 갔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밈은 대중화되면 생명력을 잃는다. 김 PD는 "밈은 절묘하게 활용될 때가 재밌다"며 "밈이 대중화되면서 너도나도 쓰는 순간, 억지스럽게 이를 연결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재미나 절묘함이 떨어질 확률이 높다"고 했다.

1일 1깡 사망 선고 글 아래에는 이런 댓글이 달렸다. '이제 다른 밈 가져오자 얘들아.'

:밈(Meme)

1976년 리처드 도킨스가 쓴 책 '이기적 유전자'에 처음 나온 단어. 그리스어 모방(mimeme)과 영어 유전자(gene)를 합한 말이다. 오늘날 대중문화계에서는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특정한 문화 요소와 콘텐츠'를 뜻하는 말로 쓴다. 비의 1일 1깡, 김영철의 4딸라, 관짝소년단 등이 그 사례다.

바보야, 문제는 '밈'이야… 美 선거 운동도 '밈'으로 바이든 '관'에 실어 보낸 트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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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6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페이스북에 올린 ‘관짝 밈’. 조 바이든 부통령의 실언 뒤에 ‘바이든 대통령’이란 관짝을 들고 춤을 추는 관짝 소년단 영상을 붙였다.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이 말실수했다. 지난달 23일 한 라디오에 출연해 "나를 지지할지 트럼프를 지지할지 판단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면, 당신은 흑인이 아니다(you ain't black)"라고 한 것. 흑인 유권자를 거수기(擧手機)로 보는 인종차별적 인식이 담겼다는 지적이 나왔다.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서 바이든과 맞붙게 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바이든의 이 발언 뒤에 '관짝 밈'을 붙인 영상을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게재했다. 소위 '관짝소년단'이 '바이든'이라고 쓰여있는 관을 들고 흥겹게 관짝 춤을 춘다. 45만명이 이 영상을 봤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는 "트럼프 진영이 이번 선거운동에서 밈을 어떻게 활용할 계획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했다.

'밈'이 대선을 앞둔 미국 정계에서 핵심 홍보 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트럼프뿐 아니다.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로 나섰던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도 중도 하차 전까지 '밈 선거운동'을 펼쳤다.

지난 2월, 300만 팔로어를 보유한 미국 인플루언서 '그레이프주스보이스(GrapeJuiceBoys)'는 블룸버그에서 받은 소셜미디어 메시지를 공개했다.

"안녕, 주스보이스. 민주당 대선 경선을 위해 내가 좀 멋지게 보일 수 있는 밈 하나 만들어 줄래?" 주스보이스가 "솔직히 말해서 당신은 그런 느낌이 아니야"라고 답하자, 블룸버그가 되받아친다. "나, 람보르기니 문짝 (캐딜락) 에스컬레이드에 달았어."

람보르기니 문짝을 캐딜락에 붙일 정도로 자신이 괴짜이며 재력이 넘쳐난다는 뜻이다. 이 대화 내용은 온라인상에서 화제를 모으며 '좋아요'를 12만개 넘게 받았다. 사실 이는 블룸버그 캠프에서 철저하게 계산한 '밈'이다. '돈으로 밈을 사려는 허당 기질 넘치는 부자 노인'이라는 자조적 콘셉트를 이용해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다.

당시 블룸버그 캠프 대변인이었던 사브리나 싱은 "대통령 선거에서 '밈 전략'은 국민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한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강력한 디지털 역량에 맞설 방안이기도 하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에서 7251만 팔로어를 보유하고 있다.

지난 3월 블룸버그는 민주당 경선에서 하차하면서, 자신의 트위터에 영화 '스타워즈'의 결전 영상을 걸고 이렇게 썼다. "곧 보자, 도널드(See you soon, Donald)."

트럼프 대통령은 영화 ‘스페이스볼’의 한 장면으로 맞섰다. 트럼프 대통령 얼굴을 합성한 키 큰 남성이 상대방 얼굴을 한 손으로 밀면, 그를 공격하려는 키 작은 남성이 짧은 두 팔을 공중에 허우적댄다. 키 작은 남성에게 합성된 사진은 물론 블룸버그다.

[남정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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