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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아무튼, 주말] 이어폰으로 귀틀막, 마스크로 입틀막… "대화가 두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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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 포비아' 앓는 2030

직장인 허윤(23)씨는 옷 가게에 들어갈 때마다 작은 '의식'을 치른다. 가방에서 무선 이어폰을 꺼내 귀를 틀어막는다. 그에게 이어폰은 호텔 방문에 내거는 'Do not disturb(방해하지 마시오)' 팻말 같은 존재. 점원에게 '말 걸지 마시오'라고 보내는 무언(無言)의 신호다. 허씨는 코로나 시대 마스크도 귀찮은 존재만은 아니라고 했다. "갑갑하지만 심리적 방어벽 한 겹이 생긴 것 같아 편안하기도 해요. 낯선 사람이 불쑥 말 걸어와 일회성 라포(rapport·관계)를 쌓아야 하는 상황이 줄어든 거니까요."

타인과 대화하기를 꺼리는 젊은 세대가 늘고 있다. 문자에 익숙해 통화를 꺼리는 콜 포비아(call phobia·통화 공포증)를 넘어 대화가 겁난다는 토크 포비아(talk phobia·대화 공포증)의 출현이다. '아무튼, 주말'이 SM C&C 플랫폼 '틸리언 프로(Tillion Pro)'에 설문을 의뢰해 이들의 마음을 들여다봤다. 20~30대 남녀 2005명이 응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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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안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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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 주문도 떨린다

취업 준비생 A(26)씨는 웬만하면 비대면 주문이 가능한 키오스크가 있는 음식점에 간다. "점원과 눈을 마주하고 말하기가 영 어색해요. 옵션 메뉴를 말하는 몇 분 동안에도 혹시 말이 꼬이면 어쩌나 긴장돼요." 대학원 시절엔 발표하는 게 힘들어 진정제를 처방받기도 했다. 직장인 B(27)씨는 "궁금한 정보가 있어도 절대 동료에게 묻지 않는다. 그들과 대화하면서 불편함을 느끼기보다 시간이 걸려도 내가 인터넷으로 검색해 찾는 게 맘이 편하다"고 했다. 직장인 C(23)씨는 쇼핑몰에서 음식점을 고를 때 매장 앞에서 메뉴를 보면 직원이 말을 걸까 봐 뒤돌아서 스마트폰으로 해당 식당 메뉴판을 검색한다.

설문에서 '타인과 대화하기가 두려운가'라는 질문에 19%가 그렇다고 말했다. 경중 차이는 있겠으나 다섯 명 중 하나는 토크 포비아를 겪는 셈이다. 이유를 묻자 '할 말이 없다'(33%)가 가장 많았고, '말하는 게 어색하다'(31%) '시간 낭비 같다'(20%) '코로나 사태로 인한 감염 우려'(15%) 등으로 나타났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는 가뜩이나 말하기 꺼리는 밀레니얼이 더 굳게 입을 걸어 잠그게 할 듯하다. 응답자 41%가 '코로나 사태 이후 말수가 줄었다'고 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에 동참하기 위해서(36%), 마스크 때문에 말하기 힘들어서(33%), 침으로 인한 감염 공포(19%), 우울해서(12%) 등의 이유였다.

자기 주도 인간관계 낯설어

왜 밀레니얼은 말하기를 힘들어할까. '밀레니얼과 함께 일하는 법'의 저자인 이은형 국민대 경영학부 교수는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자아와 세계가 연결된 세대로, 기계가 아닌 사람과 엮이는 관계에 기본적으로 부담을 느낀다"고 했다. 말도 선택과 집중 대상이다. 이 교수는 "가족, 친구, 연인 등 지극히 편한 극소수 관계에선 깊은 대화를 하지만, 애매한 관계라는 판단이 서면 대화를 최소화하려는 경향이 짙다"고 했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밀레니얼 세대는 자신이 '통제감(sense of control)'을 느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에 주목하면 그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밀레니얼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문자메시지나 이메일 등 텍스트는 자신이 100% 조정할 수 있는 매체라 편하게 느끼지만, 말로 주고받는 대화는 나와 상대가 50%씩 소유하는 것이다. 그만큼 상대를 신경 써야 하고, 자신이 조정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들에겐 텍스트보다 부담이 더 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어린 시절 관계 맺기 과정에서 원인을 찾는 전문가도 있다. 김현정 숭실대 중소기업대학원 겸임교수(리더십 전문가)는 "밀레니얼은 어렸을 때부터 놀이 학교, 학원 등 엄마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세팅 안에서 정제된 인간관계를 경험했다. 기저귀 떼면서부터 밖에 나가 낯선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전 세대와 이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했다. 이동귀 교수도 "어른들이 짜준 커뮤니티 안에서 자라나 자기 주도로 인간관계 맺는 것을 연습할 기회가 적었던 세대"라고 설명했다. 그는 "밀레니얼은 불편하거나 어색한 관계를 참고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길러지는 '관계 면역력'이 약한 편이다. 말실수를 염려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김현정 교수는 밀레니얼이 '학종(학생부 종합전형) 세대'란 점에도 주목했다. 그는 "정성적(定性的) 평가인 학종에선 교사의 평가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즉 밀레니얼은 선생님에게 괜히 잘못 보여 학생기록부상 부정적 평가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경험했다. 무의식적으로 침묵과 순응에 길든 세대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정해진 가이드를 따르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말로 미세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서툴고 이게 대화를 꺼리는 것으로 이어졌다"는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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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걸지 마세요, 이어폰에 숨은 뜻

"일을 하기 싫을 때가 아니라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이어폰을 껴요. 집중이 잘 되거든요. 몰입을 방해하지 말아 달라고 동료에게 보내는 신호이기도 하고요." 벤처캐피털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D(22)씨가 말했다. 그에게 사무실에서 쓰는 이어폰은 '딴짓 중'이 아니라 '열일 중(열심히 일하는 중)'이라는 인증. '대화 사절'의 표시이기도 하다.

이어폰은 대화를 기피하는 밀레니얼에겐 필수 아이템으로 인식된다. 응답자 60%가 '사무실에서 이어폰을 끼고 일한 적이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이 말 걸까 봐 음악이 흘러나오지 않는 이어폰을 낀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51%가 그렇다고 답했다.

회사에서 이어폰을 끼고 일하는 동료가 눈에 거슬린다면 당신은 '꼰대'일 가능성이 크다. 2030 응답자 중 절반 가까이(46%)가 이어폰 끼고 일하는 사람을 보면 '아무렇지 않다'고 했다. '일에 몰두한 것 같다'(14%) '일을 즐기는 것 같다'(14%) 등 긍정적 반응이 28%로 '노는 것 같다'(26%)는 부정적 반응보다 많았다. 근무 환경이 유연한 스타트업에선 익숙한 풍경이 된 지 오래지만, 최근엔 대기업 중에서도 이어폰 사용을 허용하는 회사가 늘고 있다.

대기업과 스타트업을 경험한 한 X세대 직장인(43)은 "몇 해 전만 해도 사무실에서 이어폰을 끼면 무례하다고 생각했지만 요즘은 용인하는 분위기"라며 "결정적으로 코로나 때문에 원격 근무가 일상화되면서 이어폰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환경이 조성됐다"고 했다. 재택근무를 하는 팀원과 수시로 화상 회의를 해야 하는 상황이 생겨 이어폰 착용이 일상화됐다는 것이다.

업무 효율에 도움이 된다는 시각도 있다. 이동귀 교수는 "1975년 영국 심리학자 던컨 고든과 앨런 배들리가 '맥락 의존적 기억(context dependent memory)'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잠수부에게 잠수 상태에서 단어를 외우게 한 뒤 물속과 육지에서 기억을 살려 보니 물속에서 더 기억을 잘했다. 익숙한 환경에서 일할 때 수행력이 높아진다는 얘기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폰을 끼고 공부한 밀레니얼에겐 이어폰 사용이 일의 능률을 올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고, 밀레니얼도 예외는 아니다. 상사한테 욕 안 먹으면서 대화를 차단하는 적응법이 등장했다. 이른바 '한끼한빼(한쪽 이어폰은 끼고 한쪽 이어폰은 빼기)'. 직장 생활 2년 차 직장인(26)이 말한다. "한쪽 귀는 닫고 나의 세계와 접속하고, 한쪽 귀는 열어 사회적 나를 유지합니다." 무선 이어폰이 이 세대에게 내린 축복이다.

[김미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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