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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칠궁 七宮…왕비가 아닌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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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너머 청와대로 이어지는 지역은 쉽게 드나들 수 없는 곳이다. 조선 시대 경복궁은 지엄하신 임금님 사시는 곳이니 당연했고, 지금 그 뒤편인 청와대 인근도 마찬가지다. 청와대 경호를 위한 조치다. 물론 경복궁은 관광지가 되어 구석구석을 다 살펴볼 수 있지만 경복궁과 연이어 있는 작은 공간들은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칠궁이다.

시티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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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궁을 가기 위해서는 효자동주민센터에서 무궁화동산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그러면 돌담길이 보인다. 경복궁의 후원쯤 되는 곳인가 생각되지만 엄연히 다른 공간, 다른 쓰임새의 장소다. 칠궁의 정문인 외삼문 앞에는 ‘하마비’가 놓여 있다. 누구라도 말이나 가마를 타고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고개를 숙여야 하는 엄숙한 공간이란 뜻이다.

외삼문을 통과하면 제례를 준비하는 재실이, 바로 옆엔 송죽재와 풍월헌 두 개의 현판이 걸린 건물이 있다. 그 뒤에 있는 것은 삼락당이다. 이어 내삼문을 지나면 바로 냉천정이 나온다. 차가운 물이 샘솟는 우물인데 지금은 마치 연못처럼 보인다. 그리고 뒷담을 경계로 왼편부터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 육상궁, 연호궁이 연이어 자리한다. 보통의 궁궐에 비하면 규모가 작고 화려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궁호宮號’를 붙인 이유는 분명하다.

칠궁은 조선 시대 왕의 생모지만 왕후가 되지 못한, 혹은 왕후의 신분이 아닌 일곱 후궁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그 시작은 영조다. 영조는 숙종의 후계인 경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영조의 생모는 원래 궁인 출신. 그녀는 숙종 때 일찍 세상을 떠난 인현 왕후의 생일상을 차려 놓았다가 숙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다. 숙원으로 첫째 아들을 낳고 숙의로 봉해진 뒤 둘째 아들을 낳았다. 이 둘째 아들이 영잉군, 바로 영조다. 경종의 서거로 왕위에 오른 영조는 자신이 왕이 되는 것도 못 보고 죽은 생모 숙빈 최 씨를 추모하기 위해 잠저인 창의궁에 사당을 건립하려다 경복궁 북쪽에 사당을 세웠다. 1725년 사당 이름은 숙빈묘, 그 뒤 육상묘로 이름을 바꾸었고 최종적으로 1753년에 이를 육상궁으로 승격시켰다. 영조는 왕비 소생이 아닌 궁인 출신 생모와 적통이 아니라는 콤플렉스를 평생 마음에 두고 살았지만, 생모인 숙빈 최 씨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다. 영조는 이곳에 ‘어머니의 은혜를 보존하는 사당’이라는 뜻의 ‘전자은어사묘全慈恩於斯廟’라는 현판을 걸고 재위 기간에 무려 200여 회가 넘게 육상궁을 찾았다.

그 뒤 조선 말기에 고종과 순종이 숙빈 최 씨와 경우가 같은 후궁 여섯의 신위를 육상궁에 같이 모시면서 칠궁이 되었다. 저경궁에는 인조의 생부인 추존왕이 된 정원군의 생모 인빈 김 씨, 대빈궁에는 경종을 낳은 숙종의 후궁 희빈 장 씨, 연호궁은 정조의 양부인 효장 세자의 생모 정빈 이 씨, 선희궁은 정조의 생부인 사도 세자의 생모 영빈 이 씨, 경우궁은 순조의 생모 수빈 박 씨, 덕안궁은 영친왕의 생모 엄황귀비가 모셔져 있다. 이들은 아들이 왕위에 올랐지만 왕후가 되지 못한, 그래서 종묘에 추존되지 못한 공통점을 가진다.

그동안 칠궁에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못한 것은 청와대와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우리가 김신조 사건으로 알고 있는 1968년 1.21사건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북한군 31명이 청와대 앞마당까지 침투했는데 이들이 바로 경복고등학교 뒷문과 칠궁 사이까지 침투해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바 있다. 이후 청와대 경호를 위해 칠궁 문이 닫혔고 2001년 청와대 일부가 공개되면서 칠궁도 함께 풀렸다. 물론 지금도 미리 관람 신청을 해야 하지만 1년 중에 딱 하루는 자유로운 관람이 가능한 날이 있다. 바로 10월 넷째 주 월요일로, 전주 이 씨 대동종약원에서 칠궁의 제사를 지내는 날이다.

[글 장진혁(프리랜서) 사진 문화재청]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32호 (20.06.09)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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