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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유연하고 자유로운 정신’으로 지성을 풀어낸 인문주의자 [김언호가 만난 시대정신의 현인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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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학자 이광주 교수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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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지성사를 연구한 이광주 교수. 애서가이자 독서가인 이 교수는 도그마로부터 해방된 진정한 교양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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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도시 베네치아. 아드리아해 점토층에 수백만 개의 떡갈나무 말뚝을 박아 기층을 만들고, 118개의 섬과 크고 작은 운하 150개, 400개의 다리로 연결된 수상도시 베네치아를 떠올리면서 나는 다시 여행을 마음먹는다. 신이 인간을 만들고 인간이 도시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바다에 도시를 만들겠다는 경이로운 발상은 과연 어디에서 나왔을까.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 항해자들과 상인들의 도시 베네치아, 그 예술적 성과의 찬란함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새 천년이 시작되던 그해 나는 친구들을 선동하여 베네치아로 다시 떠났다. 그 초여름날 저녁 나절, 서양사학자 이광주(李光周·1927~2020) 교수와 나는 산마르코광장에 들어섰다. 비잔틴 로마네스크 양식의 산마르코대성당과 고딕 양식의 두칼레궁전이 주연으로 연출해내는 오리엔트풍의 장려하고도 환상적인 산마르코광장의 빛과 색은 여인(旅人)들을 매혹하기에 언제나 충분하다.

그 산마르코광장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 플로리안이 있다. 1720년에 문을 연 꽃의 여신 플로리안. 뉴밀레니엄을 맞는 우리의 여행은 수많은 인문·예술가들을 유혹한 플로리안에 가는 것이기도 했다. 인문·예술가들뿐 아니라 온갖 상인들의 익숙한 행선지가 되기도 한 플로리안은 사실은 겨울에 더 붐볐다. 날로 번성하여 ‘카페 플로리안으로 가자’라는 말이 베네치아 사람들의 일상이 되었다. 자유로운 담론의 공간. 플로리안은 괴테와 모네와 카사노바, 프랑스혁명을 지지하는 지식인들의 아지트가 된 카페의 벽을 장식하는 수많은 메시지가 여행자들의 심사를 흔들어 놓는다. 노을에 물드는 그 바닷물처럼. 우리는 뮤지션들의 능숙한 연주를 들으면서 커피를 마셨다. 이탈리아 여행의 절정이었다.

■ 대포 소리 뒤로하고 독서삼매경에 빠진 애서가

전두환 신군부 맞서다 물러난 뒤
자유분방한 책 쓰기로 교양 전파

전두환 신군부가 광주의 학살을 딛고 권력을 찬탈하는 1980년 5월에 나는 이광주 교수가 중심이 되는 충남대 교수 7인의 논문집 <상황과 인식>을 펴냈다. 스스로의 학문적 자리에서 시대정신을 말하고 있었다. 선생은 머리말 글을 썼다.

“교수들이 강단에서 물러나게 되고, 학생들이 학원에서 추방되었다. 진정한 인식은 단순한 이론적 이성의 영역을 넘어서서 역사적 상황과 관련되는 실천적 의미를 획득해야 한다. 이 책은 우리들의 당초의 뜻대로, 봄과 함께 학원에 다시 돌아온 학생들과, 이 땅의 모든 학생들에게 바쳐짐을 분명히 한다. 그들이 지향하는 곳에 우리들 모두의 진실이 있음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

이광주 교수는 결국 1981년 2월 말 충남대에서 쫓겨난다. 이 교수는 그러나 1년 후 전주대로 간다. 문교부는 전주대학에 발령을 취소하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총장은 이미 발령을 냈다면서 문교부의 압력을 견뎌냈다. 전주대 교수들도 이 교수를 교수협의회 의장으로 추대했고, 이어 그를 총장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재단이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이 교수는 재단과 맞서면서 총장을 하지 않겠다고 사양했다.

1997년 퇴임한 선생은 자유분방한 책쓰기를 진전시킨다. 2001년에 출간한 <아름다운 지상의 책 한권>은 책과 지성과 교양의 세계를 품격 있게 풀어냄으로써 이 땅의 독서인들을 아름다운 인문의 세계로 안내한다. 6·25가 터지고 북한군이 서울로 진격해올 때, 고려대 교정에서 펑펑하는 폿소리도 뒤로하고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다는 독서인이자 애서가 이광주!

“책방을 찾아가는 길은 여행길과도 같이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해방되는 자유인의 길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책의 집’을 ‘영혼의 치유장’으로 표현했듯이, 현실보다도 공상의 세계에 기대어 하루하루 나 자신을 길들인 유년 시절부터 책은 나에게 무엇보다도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나를 정화하는 마력을 지닌 감성과 지성의 연금장이었다. 우리는 극장이나 화랑에 가서 간혹 실망하는 일은 있어도 책방에서 실망하는 일은 없다.”

■ 책방 순례, 윌리엄 모리스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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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북하우스에서 열린 윌리엄 모리스 특별전 ‘책으로 펼치는 유토피아’에 참석한 이광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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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해방되는 자유의 길”
책을 찾아 세계를 여행한 애서가
선생과 함께 책방 순례에서 접한
19세기 책의 장인 윌리엄 모리스

나는 선생과 함께 일본의 책방들, 170여 고서점들이 문을 열고 있는 도쿄의 진보초(神保町)를 수도 없이 여행했다. 15년 전, 진보초에서 유럽의 고서를 전시하는 책의 축제가 있었다. 그때 나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1776)이 출품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선생께 말씀드려 같이 갔다. <국부론>을 한국의 대학도서관이 소장하도록 주선해보고 싶기도 했다.

선생과 함께 진보초에 갈 때면 나는 한국YMCA호텔에 머문다. 1919년 2월8일 도쿄의 조선유학생들이 조선독립을 선언한 그 현장에 세워진 작고 소박한 호텔이다. JR 스이도바시(水道橋) 역에서 YMCA호텔로 가는 길목에 니혼대학 경제학부가 있고 그 건물 가장자리에 <국부론>과 케네의 <경제표>(1758) 초판본을 소장하고 있다는 표지판이 있다. 길손들에게 역사를 만든 고전, 그 존재와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서점거리 진보초와 잘 어울리는 기념표지다. 그러나 그때 <국부론>은 출품되지 않았다. 이미 다른 애서가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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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 영국의 토털 아티스트이자 책의 장인 윌리엄 모리스(왼쪽 사진). 모리스는 “가장 위대한 인간의 예술적 소산”은 건축과 책이라고 했다. 윌리엄 모리스가 생애에 걸쳐 연구해 만든 <초서 저작집>(오른쪽). ‘인간이 만든 가장 아름다운 한 권의 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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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과 책과 책방을 순례하면서 나는 19세기 영국의 토털 아티스트이자 위대한 책의 장인 윌리엄 모리스(1834~1896)를 만나게 된다. 1891년에 창설한 그의 공방 켈름스코트(Kelmscott)가 펴낸 책들을 보면서 나는 경악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책을 디자인해내는 그 예술혼! 윌리엄 모리스는 나의 책 만들기에 굳건히 자리를 잡게 되었고, 켈름스코트가 펴낸 53종 68권을 컬렉션하게 되었다. 이광주 선생과의 여행과 담론의 귀결이었다. 윌리엄 모리스는 나의 영원한 책의 스승이 되었다.

나는 이어 윌리엄 모리스에게 영향을 준 영국의 예술사가이자 사회사상가인 존 러스킨(1819~1900)을 만나게 된다. 다시 찾아간 베네치아에서 러스킨의 명저 <베니스의 돌>(The Stone of Venice) 전 3권(1886)을 구하고는 모든 것을 다 이룬 듯 신나 했다. 2002년 스페인의 빌바오를 여행하면서 도레의 <런던순례>(1872)를 구했는데, 프랑크 게리가 설계해 1997년에 개관하는 구겐하임 미술관을 보는 것 이상으로 행복한 일이었다.

이광주 선생은 2007년에 <아름다운 책 이야기: 중세사본에서 윌리엄 모리스까지>를 저술해낸다. 윌리엄 모리스에 의기투합하는 선생과 나의 ‘합작품’ 같은 것이었다.

■ 진정한 이야기문화, 바람직한 공동체

‘아름다운 책 이야기’로 출간
자기중심 도그마 탈피한 교양인
사회가 필요로 하는 열린 사유로
‘담론의 탄생’ ‘교양의 탄생’ 등
진정한 공동체·담론 문화 논해

서양사학자 이광주의 근본은 자유정신이다. 그의 주제는 어떤 이념이나 시대의 흐름에 앞서서 인간을, 인간다움을 무엇보다 귀하게 여긴다. 그 자유로운 정신과 인간다움이 그의 학문과 삶의 지향이다. 역사학자이지만 특정의 역사이론에 규정되지 않는다. 정년 이후 선생이 써내는 일련의 책들 주제는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열린 사유였다. 2005년 펴내는 <나의 유럽 나의 편력: 젊은 날 내 영혼의 거장들>에서 다루는 인문예술가와 사상가들은 바로 그의 인식과 성찰이다.

“21세기는 창조적 개인의 시대라고 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된다. 우리는 낡은 도그마나 이데올로기로부터 과연 얼마나 자유로운가. 갖가지 명분으로 편가르는 우상을 지금도 받들고, 담론을 외면하는 인간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다. 시대착오적인 국가주의자들이 설치고, 어린아이들까지도 시장원리로 줄을 세운다. 참으로 유연하고 자유로운 정신이 그 어느 때보다도 흠모된다. 따뜻한 인간성, 자유로운 정신이 그립다.”

좋은 만남이란 내 말에 앞서 마주한 사람 그의 말에 귀 기울임이다. 공자는 셋이 모이면 한 스승이 있다고 했다. 사르트르는 말을 나눔으로써 우리 모두는 “세계를 발견하고 창조한다”고 했다. 그리스에서는 사람됨, 인간 교양의 최고 덕목은 세련되고 아름다운 언동(言動)이었다. 수사학이 철학보다 더 귀하게 여겨진 이유다. 이광주 선생은 유럽의 열려 있는 담론의 공간 살롱과 카페를 이야기한다. <담론의 탄생: 유럽의 살롱과 클럽과 카페, 그 자유로운 풍경>이 그것이다.

“반듯한 사회, 좋은 사회란 자유로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다. 오늘날 참으로 절실한 바람은 하이데거가 강조한 것처럼 자신의 입장을 방하(放下)함으로써 사물의 진실에 눈을 뜨는 데 있을 것이다. 나무 한 그루는 숲을 이루지 못한다(獨木不林). 자기중심의 교리나 도그마, 계산하는 사유에서 벗어나 너와 나, 우리 모두의 공동체, 진정한 이야기문화, 담론문화의 형성을 주제로 감히 한 권의 책을 엮은 이유다.”

■ 끝내 이루지 못한 약속

이광주 교수는 2009년 대저 <교양의 탄생: 유럽을 만든 인문정신>을 써낸다. 인문주의자 이광주의 지향과 콘텐츠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한 권의 책이다. 지(知)를 사랑하는 그리스인들의 철학과 수사학으로부터 1968년 5월의 혁명과 열정을 해석해낸다. 유럽의 정신과 미학, 학문과 사상을 담론한다. “교양은 시공과 역사적 상황에 따라 조각탁마(彫刻琢磨)되고 자기변모를 거듭한다. 교양인이란 파우스트처럼 끊임없이 묻고 탐색하는 인간이다.” 그 배움은 광장이나 살롱에서 나누는 담론을 통해 배양된다. 진정한 교양인은 서재의 인간이 아닐 것이다.

“인간은 교양으로 자유에 눈뜨고 자유로 인해 이웃과 사회를 의식한다. 그리스의 애지자(愛知者)는 폴리스 공동체를 사랑하는 자유인이었다. 그런 까닭에 플라톤을 비롯한 많은 교양인들이 망명과 유배의 나날을 보냈다. 그들의 멘토였던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들어야 했다. 교양이라는 텍스트는 역사의 진운에 슬기롭게 대응함으로써 새로 쓰이고 그 콘텐츠와 이념의 지평을 확대하고 심화한다. 교양은 어떠한 교회나 국가도, 어떠한 도그마나 권위도 부정한다. 그들이 깔아놓은 이데올로기로부터의 자유야말로 교양의 징표다.”

헤이리 회원들과 교토와 나라와 오사카를 건축투어할 때였다. 일행은 일본작가 시바 료타로의 기념관을 보기로 했다. 그가 살던 집 정원에 안도 다다오의 설계로 지어진 그 기념관의 서가를 나는 보자고 했다. 함께 여행한 선생은 그 기념관에 들어가지 않았다. 시바의 소설을 재미있게 읽기는 했지만, 일부러 그 기념관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는 선생이었다.

고전을 읽고 고전을 천착한 선생은 우리가 펴내는 한길그레이트북스를 늘 치하하는 말씀을 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고전학자이자 뛰어난 출판인이었던 마누티우스의 출판 모토 ‘천천히 빨리’의 명구가 생각난다. 책은 성(聖)과 속(俗)을 넘나드는 광대무변의 세계, 고전은 책 중의 책이다. 한 시대와 한 국민의 감성과 취향, 바람과 고뇌, 정념과 욕망, 미의식과 사상의 표현인 거대한 두루마리와도 같은 고전은 그것이 씌어진 시대나 지역을 넘어서는, 인류의 영원불변한 문화유산이다. 현실의 표상이자 미래를 고지(告知)한다. 문학의 고전이 심오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시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면, 인문사회 고전은 공공선(公共善)의 증진과 반듯한 역사, 올바른 사회를 꿈꾸게 한다. 한 국민, 한 국가의 위상과 품격은 그 교양계층에 달려 있다. 교양계층이란 고전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선생은 나에게 좀 긴 유럽여행을 하자 했다. 파리·빈·베를린·런던·로마·베네치아를 천천히 걸으면서, 그 문화와 예술을 한껏 누려보자는 것이었다. 그 서점들과 그 카페들과 미술관·박물관을 여유롭게 탐방하자고 했다. 런던에 가서는 윌리엄 모리스를 다시 보자 했다. 켈름스코트 그 출판공방을 가보자 했다. 이 약속은 나의 이런저런 일정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선생의 별세 소식을 접한 나는 유럽여행 약속을 함께하지 못한 것에 가슴을 쳤다.

■필자 김언호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1976년 출판사 한길사를 설립해 현재 한길사와 한길책박물관 대표를 맡고 있다. 한국출판인회의와 동아시아출판인회의 회장을 지냈으며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책의 공화국에서> <김언호의 세계서점기행> 등을 썼다.


김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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