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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2 (토)

4줄짜리 악보 840번 친 피아니스트…곡명 ‘짜증’ 미션 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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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 작곡가 곡 15시간30분 연주

레비트 “화장실 두 번, 화나도 참아”

수익금 코로나 타격 예술인 지원

중앙일보

레비트가 ‘짜증’을 연주하고 있다. [유튜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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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도 안 되는 소절을 피아노로 840번 반복해서 연주하기. 독일 피아니스트 이고르 레비트(30)가 15시간 30분 동안 한 일이다. 레비트는 베를린의 한 스튜디오에서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오후 2시부터 다음 날 오전 5시 30분까지 총 15시간 30분 동안 에릭 사티의 ‘짜증(Vexations)’을 연주하고 유튜브, 인스타그램으로 중계했다.

이 작품은 괴짜 작곡가 사티가 1890년대 만든 곡이다. 악보는 단 네 줄. 사티는 악보 위에 ‘840번을 연이어 연주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고 깊이 침묵해야 한다’라고 썼다. 사티는 다른 작품에서도 ‘주머니에 송곳을 넣고’ ‘과식하지 말고’ ‘의문을 가지고’ ‘구멍을 파듯’이라는 미스터리한 지시어를 남긴 작곡가다. 이런 기법으로, 기존의 음악과 작곡법, 엄숙주의에 반대했다. 20세기 괴짜 아티스트 존 케이지도 1963년 뉴욕에서 피아니스트 10명과 함께 18시간 동안 ‘짜증’을 연주했다. 1970년엔 피터 에반스가 독주에 나섰지만, 595번 반복 후 포기했다.

레비트는 뒤로 갈수록 지쳐 보였고, 중간중간 속도를 올렸다가 평온한 템포로 돌아오곤 했다. 피아노 옆엔 바나나와 칩 등이 있었지만 먹진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숨을 내쉬거나 이마를 짚어가며 괴로워한 레비트는 연주를 끝내곤 피아노 뚜껑을 덮고 휴대전화를 집어 든 채 무대를 떠났다. 7시간대와 11시간대에 휴식 시간을 가졌다. 연주 후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레비트는 “연주 중간 화가 나고, 슬프고 황폐한 감정이 들었다”며 “하지만 계속 연주하도록 나 자신을 내버려 뒀다”고 했다. 그는 또 “연주하며 물 5리터 반을 마셨기 때문에 두 번 화장실에 다녀와야 했다”고 말했다.


러시아에서 8세 때 독일로 이민 온 레비트는 유럽·북미에서 각광받는 연주자다. 소신있는 행보로 ‘21세기 사티’로 불릴 때도 있다. 2017년 7월 런던의 BBC 프롬스 무대에서 브렉시트를 비판하며 EU찬가를 앙코르곡으로 연주하기도 했다.

레비트는 사티의 한장짜리 악보를 840장 복사해 한장 한장 던져가며 완주했고, 이 악보들을 경매에 부친다. 경매 수익금은 코로나19로 연주 기회를 잃은 예술인들을 위해 쓴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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