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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2 (화)

정약용 둘째 아들의 흑산도 기행 문헌 최초로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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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한양대 교수, 정학유 흑산도 기행문 '부해기' 확인

CBS노컷뉴스 권혁주 기자

노컷뉴스

정학유의 흑산도 기행문 '부해기'(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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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다섯 마리가 나와 노닐며 멀리서 거슬러 왔다. 그중 한 마리가 하늘을 향해 물을 뿜는데, 그 형세가 마치 흰 무지개 같고, 높이는 백 길 남짓이었다. 처음 입에서 물을 뿜자 물기둥이 하늘 끝까지 떠받치는 것 같았다" ('부해기' 1809년 2월 12일)

다산(茶山) 정약용의 둘째 아들 정학유(1786∼1855)가 전남 신안 흑산도가 멀리 바라다보이는 교맥섬 인근에서 고래를 목격하고 쓴 글인데 묘사가 생생하다.

정학유가 부친의 당부로 유배 중이던 둘째 큰아버지 정약전을 만나기 위해 1809년 2월 3일부터 3월 24일까지 52일간 흑산도를 다녀온 여정을 기록한 '부해기'(浮海記)가 최초로 발견됐다.

정민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다산 집안에서 간직했던 책인 '유고' 10책 가운데 8∼10책에 수록된 정학유의 문집 '운포유고'(耘圃遺稿)에서 '부해기'를 확인했다고 1일 밝혔다.

유고 10책은 '운포유고'를 비롯해 조선 중종 때 문신 정수강의 '월헌집', 다산의 부친 정재원의 '하석유고' 등 집안의 문집을 모은 책이다.

'운포유고'는 시집 8권과 문집 2권으로 구성돼 있는데 '부해기'는 10책 문집 권2에 실려 있다.

정학유는 형 학연과 함께 다산의 '주역심전'(周易心箋)을 정리해 완성하는 등 다산의 학문 활동을 도운 인물이다.

당시 정학유가 흑산도에 간 것은 아버지의 당부 때문이었다. 정약전의 아들 학초가 1807년 17세에 세상을 떠나자 다산은 유배지에서 절망에 빠진 형을 위해 1808년 봄 강진에 온 둘째 아들을 이듬해 흑산도로 보냈다.

'부해기'에 따르면 정학유는 1809년 2월 3일 강진을 출발해 영암 도씨포(현 도포리)에서 배를 타고 정개도, 목포보(목포 만호동에 있던 수군 진영), 고하도를 거쳐 팔금도와 비금도를 지나 흑산도에 도착했다.

이후 정약전과 만나 공부를 점검받는 한편 너럭바위와 소라굴 등 여러 승경을 유람하고, 정약전의 생일잔치까지 치른 뒤 강진으로 돌아왔다.

'부해기'에는 흑산도에 이르는 여정과 당시 선박 운항 방식, 흑산도의 풍경과 특산물, 풍속과 주민 생활, 중국 표류선에 대한 증언, 무리 지어 몰려다니는 개(山犬) 이야기 등 다채로운 내용이 일기 형식으로 담겨 있다.

정민 교수는 "부해기'와 시 12수는 흑산도 지역사 연구는 물론 정약전의 흑산도 유배 공간을 이해하는 데 유익한 정보를 주고, 운포유고는 다산학 연구에 가치가 큰 자료로 보인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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