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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0 (금)

“개도 금사슬을 했다”… ‘황금의 나라’ 신라의 대표 유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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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를 방문한 여행자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금이 너무 흔하다. 심지의 개의 쇠사슬도 금으로 만든다.”

아랍의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의 ‘천애횡단갈망자의 산책’이란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신라가 멸망(935년)하고 한참 뒤인 1154년 나온 책이긴 하지만 신라에 대한 외국의 인식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하기에는 충분하다.

옛 기록이 전하는 ‘황금의 나라’ 신라의 위상은 이제 각종 금제 유물로 확인되고 있다. 금관과 귀고리, 허리띠, 관모 등은 신라에 금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신라인들이 그것을 얼마나 잘 다루는 지를 증언한다.

세계일보

경주 황남동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 문화재청 제공


경주 ‘황남동 120-2호분’에서 금동신발이 발굴된 사실이 지난 27일 공개됐다. 금동신발 뿐만 아니라 “허리띠 은판, 금동 말안장 등 다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금동신발 출토는 1977년 인왕동 고분군 조사 이후 43년만이며 발굴이 좀 더 진행되면 금관이나 좀 더 화려한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중동 지역에까지 알려진 신라의 황금문화를 대표하는 유물들은 무엇이 있을까.

◆금관-신라의 시각적 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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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총 금관


1921년 9월 경주 노서동, 한 민가의 증축공사 중 진기한 유물들이 쏟아졌다. 공사를 하며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고분을 건드렸던 것. 당시 언론에서 ‘동양의 투탕카멘 왕릉’이라고 대서특필되며 세상에 모습을 이 고분이 금관총이다. 신라 문화에 대한 관심을 크게 높이고, 경주 지역 고분에 대한 조사도 활발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된 금관총에서 나온 유물은 양과 질 모두 탁월했으나 ‘대표선수’는 그 이름이 말해주듯 금관이다.

금관총을 시작으로 금령총(1924년), 서봉총(1926년), 교동(1972년 압수), 천마총(1973년), 황남대총(1974년)에서 출토된 금관은 신라를 상징하는 ‘시각적 표상’이다. 1970년대 미국, 일본에서 열린 대규모 해외 특별전 ‘한국미술오천년전’에는 천마총 금관이 출품돼 한국의 고대미술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금관은 고분의 위상을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경주의 고분은 압도적인 규모 때문에 왕릉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가 않다. 무덤의 규모는 물론 부장품의 수준에 따라 무덤 주인의 위계를 판단하는 데, 금관이 나오면 일단 왕족의 무덤을 판단한다.

◆금귀고리-금속공예술의 정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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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총 금귀고리


금귀고리는 경주 고분을 발굴하면 거의 예외없이 출토되는 유물이다. 이번에 금동신발이 나온 황남동의 다른 고분에서도 다양한 금귀고리가 출토된 바 있다. 형태는 크게 여성용으로 추정되는 굵은 고리 귀걸이, 남성용으로 추정되는 가는 고리 귀걸이로 나뉜다.

국보 90호 ‘경주 부부총 금귀걸이’는 금귀고리의 대표작이자 신라 금속공예기술의 최상의 사례로 언급된다. 둥근 고리에 수 백개의 금알갱이로 거북등무늬를 표현하고, 그 안에 꽃을 표현했다. 밑부분 나뭇잎 모양의 작은 장식들을 금실을 꼬아서 연결하고 장식 끝에 커다란 하트모양을 달았다.

◆금동신발-우주관·내세관의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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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리총 금동신발 출토 당시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금관총이 그렇듯 경주의 고분은 대표적인 출토 유물에 따라 이름을 짓는 경우가 종종 있다. 천마총, 금령총이 그렇고 식리총(飾履塚)도 같은 사례다. 금관총 발견 이후 조선총독부박물관은 1924년 노서동 126호분을 발굴했는데 여기서 금동신발, 즉 식리가 나왔다. 좌우와 바닥을 이룬 3장의 금동판에는 사람 머리를 한 새, 기린, 현무, 날개 달린 물고기 등의 무뉘가 새겨져 있다. 이 금동신발은 신라인의 우주관과 내세관을 담은 것으로 해석된다.

가장 오래된 금동신발은 황남대총에서 나왔다. 5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역시 3장의 금동판으로 구성했고, 표면에 ‘凸’ 모양의 무늬를 맞새김했다.

◆보검-동·서양 교류의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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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로 보검


칼은 금과는 거리가 있는 물건처럼 느껴지지만 고분에서 나온 큰칼의 대부분은 금과 은으로 장식되어 있다.

천마총 고리자루큰칼은 칼집, 칼자루는 나무로 만들고 그 위에 얇은 금동을 입혔다. 칼집 끝은 금판으로 된 작은 돌기가 두 개 달려있다. 이런 칼이 실제 무기로 사용되었을 리는 만무하고, 소유자의 신분을 드러내는 위세품(威勢品)으로 여겨진다.

보물 635호인 계림로 보검은 신라의 국제교류 양상을 보여주는 유물이라는 점에서 특이한 사례다. 1973년 계림로 공사 때 노출된 것으로 철제 칼집과 칼은 썩어 없어져 버리고 금으로 된 장식만이 남아 있다. 삼국시대의 고리자루칼과 형태, 문양이 전혀 다른 이런 형태의 단검은 유럽에서 중동지방에 걸쳐 발견되어 동·서양 문화교류의 한 단면을 알 수 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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