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각 큰스님이 자신의 거처인 해인사 퇴설당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다. [사진 제공 = 해인사] |
깨달음을 만나러 가는 길은 멀었다. 서울에서 KTX를 타고 김천구미역에 내려 다시 자동차로 갈아타고 굽이굽이 산길을 달려가는 동안 줄곧 비가 내렸다. 차로 한 시간을 훨씬 넘게 달렸을까. 드디어 경남 합천 해인사 일주문이 보였다. 차에서 내려 일주문을 넘어서자 피안(彼岸)에 들어선 듯 비가 그쳐 있었다. 일주문 뒤에 쓰여 있는 글귀는 몇 번을 읽어도 의미가 새로웠다. '천겁이 흘렀어도 옛날이 아니고, 만세를 흘러도 언제나 지금이네(歷千劫而不古, 亘萬歲而長今)' .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땅. 천년고찰 해인사는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고찰에는 소문난 선지식이 한 분 있었다. 해인총림의 가장 큰 어른이자 방장인 원각 큰스님. 스님이 머무는 해인사 경내 퇴설당. 자리에 앉자 신비스러운 무게감이 느껴졌다. 성철, 혜암 법전 스님이 머물렀던 바로 그 방이었다. 이윽고 소박하면서도 준엄한 미소를 지닌 스님이 나왔다. "먼길 오느라 수고하셨네." 긴 대화가 시작됐고 스님은 시종일관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으로 기자가 던진 우문에 현답으로 응수했다.
―전생이 뭔가요. 윤회는 정말 있나요.▷어제가 전생이고 오늘이 금생이고, 내일이 내생이지(하하). 윤회? 끊임없이 윤회는 계속되지만 그것도 실체가 있는 건 아니야.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또 내일이고, 내일은 또 어제야. 어제와 오늘이 따로 있는 게 아니야. 일주문에 쓰여 있는 말이 그 말이야.
―현대인들은 물질은 풍족하지만 마음은 불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살기는 편해졌어. 그런데 사람들 간의 시비장단(是非長短)은 더 많아졌지. 갈등 시비가 늘어나고 각박해지니까 피폐하고 불안해지는 거야. 아무리 재물이 풍족하고 자리가 높아져도 갈등은 거기서 또 시작되는 거지. 근본적인 것을 해결해야 해. 원리를 알아야 한다고. 풀이 나오면 당장은 돌로 누를 수 있지만 그걸로는 안 돼. 풀을 뿌리째 뽑아야 하지.
―현대인들이 불안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맑아져야지. 흙이 섞인 물은 조금만 흔들면 흙탕물이 되지만 맑은 물은 아무리 흔들어도 흙탕물이 안 돼. 그 안에 흙이 없기 때문이지. 본마음 바탕을 깨달아야 하는 거야. 이조 혜가 스님은 아주 공부를 많이 한 분이었어. 그런데 계속 마음이 불안한 거야. 그래서 달마 스님을 찾아갔지. "스님, 제 불안한 마음 좀 해결해주세요"하니까 달마 스님이 그래. "네 마음을 내놓아봐라. 그러면 해결해줄게"하고 말해. 다시 이조 혜가 스님이 "아무리 찾아도 마음을 찾을 수 없습니다"하자 달마 스님은 "됐다. 이제 내가 네 불안을 해결했다"하시는 거야. 그때서야 이조 혜가 스님은 깨달아.
―본성을 깨달은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지.
▷당나라 혜해(慧海) 스님이 '돈오입도요문론'에서 이렇게 말했어. '인욕제일도 선수제아인 사래무소수 즉진보리신(忍辱第一道 先須除我人 事來無所受 卽眞菩提身)'이라. 풀면 이래. 참는 것이 제일가는 도라, 먼저 나다 너다 하는 양변을 버리고, 일이 와도 받는 바 없으면, 바로 거기가 참다운 부처다. 거울은 세상 모든 것을 비추지만 거울에는 자취가 남지 않아. 거울처럼 본성의 바탕에서 살아야 해.
―그게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성철 스님도 그러셨어. 인간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걸 계발해서 써야 해.
―AI가 나오는 과학기술시대에 불교는 무엇을 할 수 있나요.
▷그런 시대일수록 근본이 더 필요해. 불교의 교리가 더 절실하지. 부처님의 말씀이 지금 시대에 더 맞아. 현상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거야. 하지만 본래의 마음 바탕, 즉 진리의 당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어. 상황이 달라진다고 바탕이 달라지지는 않지. 그게 AI든 뭐든. 근본에서 출발하면 안심이 되고 서로 편해져.
―어떤 방법으로 마음 공부를 해야 하나요.
▷참선하고 명상하고 산란스러운 마음들을 다스려야지. 근본 마음자리를 깨달아 시비장단에서 벗어나야지.
―사람들은 종교를 향해 무엇을 해달라는 기도를 하게 되는데.
▷내 본래의 마음 바탕을 찾고, 그 자리에서 자기 본분을 다해야 부처님의 가피도 입고하는 거야. 무조건. 뭐해 달라 하면 안 돼. 불이 났으면 불을 꺼야지 기도만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야. 그게 지혜야. 내 노력이 우선이고 그다음 정성을 들여야 하지.
―죽음은 뭔가요.
▷옛 스님 게송에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요(삶이란 구름이 일어남이요)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이라(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짐이라) 부운자체본무실(浮雲自體本無實)하니(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 생사거래역여연(生死去來亦如然)이라(죽고 살고 오고 가는 것이 모두 그와 같으니라)"고 했어.
구름이 일어나고 꺼져도 하늘 바탕은 그대로 있어. 나고 죽는 것은 현상계의 일일 뿐 근본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야. 우리가 근본을 등지고 중생의 업으로만 사니까 자꾸 세상이 복잡해져. 본성의 바탕에서 출발해야 우리 마음이 안심이 되는 거지.
―코로나19 확산 사태가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건 아닌지.
▷다 같이 업(業)을 지어서 그 결과를 받는 거야. 자연을 파괴하고, 살생을 하고 그것을 먹고 했던 것의 과보(果報)를 받는 거지. 이번 기회에 우리가 함께 반성하고 성찰해야 해.
―불기 2564년 부처님 오신 날 행사가 한 달 연기 됐는데.
▷사상 초유의 일이야. 해인사도 한 달간 산문을 폐쇄했어. 이번 부처님오신날은 '천지여아동근 만물여아일체(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一體)'의 심정으로 등을 밝혀야 해. '하늘과 땅은 나와 그 뿌리가 같고, 온갖 만물은 나와 한 몸'이라는 이야기야. 이번 코로나 사태는 우리에게 그걸 가르치는 거야.
―부처님 오신 날의 의미는.
▷부처님은 태자로서 왕궁에서 태어나서 영화를 누릴 수 있었는데 생로병사의 고통을 보고 출가를 했지. 난행과 고행을 해서 진리를 깨닫고 보니, 중생의 본성이나 부처님의 본성이 차이가 없었어. 그때부터 법을 펼치셨지. 본성은 부처나 중생이나 같아. 지구촌 사람들이 미혹에서 벗어나 근본을 회복하기를 기원하는 날이지.
―어떤 계기로 출가를 하시게 됐는지.
▷고등학교를 마치고 요 밑에 약수암에 와서 공부를 했어. 그때 해인사 중봉암에 계시던 도림 스님(봉철 스님으로 개명)이 자주 약수암에 다녀가셨어. 어느 날 스님께 "저는 어렸을 때부터 '착하게 사는 것'에 대한 강박 관념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착하게 살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지. 그랬더니 스님이 "착한 것도 내려놓고 악한 것도 내려놓아라"고 하셨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발심(發心)이 됐어.
―혜암 스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평생을 눕지 않고 장좌불와로 사셨어. 하루 한 끼만 드시면서 정진했지. 스님은 법문할 때 늘 공부하다 죽어라, 죽을 힘을 다해 공부해야 한다고 하셨지. 나하고 인연이 많아. 스님이 1946년도에 출가하셨는데 내가 1946년에 태어났어. 스님이 11월 17일 입적하셨는데 내 생일이 11월 17일이야. 승속이 둘이 아니고 생사도 둘이 아니라는 걸 나에게 법문해주신 듯한 느낌이 들어.
―올해가 스승인 혜암 스님 탄생 100주년인데.
▷4월 14일에 탄신 100주년 행사를 하기로 했는데 코로나로 행사를 9월 19일로 연기했어. 그때 종정 스님 모시고 법회를 여법하게 봉행하려고 준비하고 있어. '혜암선사 삶과 사상' '혜암선사 선사상연구' 책도 같이 봉정하고, 뒤를 이어 혜암평전도 출간할 예정이고.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수륙대재 행사도 하시죠.
▷해인사에서 한국전쟁 70주년 해원과 상생을 위한 수륙대재(水陸大齋)를 봉행해. 희생된 영혼들이 서로서로 용서하고 화해해서 천도가 될 수 있도록. 수륙대재는 6월 6~7일 양일간 하는데 10만개의 등을 밝혀. 돌아가신 영가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이고득락하고 남북한도 서로 화해하고 상생해서 이 인연으로 세계가 평화로워지기를 기원하는 거지.
―요즈음 불교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아졌는데.
▷보편적으로 각자가 신심 있게 살고 있는지 그것을 반성해야 해. 부처님 말씀대로 신심 있게 실천하는지가 중요해. 수행을 제대로 하는지 소임을 맡으면 공심(公心)으로 사는지. 수시로 점검하고 스스로 각자 반성할 필요가 있어. 세상에 도움을 줘야지 부담을 주면 안 돼.
―종단 안팎으로 갈등과 반목의 목소리도 많은데.
▷서로 어떤 일이 있으면 부처님 법을 믿고 해결을 해야 해. 부처님이 중도(中道)를 말씀하셨어. 중도는 이것저것 중간으로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도 내려놓고 저것도 내려놓고 본래의 마음 바탕에서 해결해야 해. 내 이해관계 욕심에만 맞추다보면 갈등과 시비가 생겨. 중도로서 상대방 안(案)이 좋으면 상대방 안을, 내 안이 좋으면 내 안을 수용해서 처리하면 문제될 것이 없고, 상생이 되는 거지.
▶▶ 원각스님은…
1946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으며 조계종 전 종정 혜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67년 계를 받았다. 이후 해인총림, 영축총림, 조계총림 선원과 범어사, 상원사 등 제방선원에서 수행정진했다. 경남 거창 고견사 주지, 해인사 원당암 감원 겸 달마선원 선원장, 해인총림 유나 등을 역임했다. 2015년 해인사 사찰, 참선도량인 선원(禪院), 경전 교육기관 강원(講院), 계율 기관인 율원(律院)을 모두 총괄하는 해인총림 방장에 추대됐다.
[허연 문화선임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