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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용서한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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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수 할머니 관련한 언론 보도
‘무엇’이 빠진 채 ‘용서’ 표현 남발
그 쓰임새가 지닌 위험성에 걱정

어쩌면 다른 피해자와 구별되는
‘특권화’ 피해자 담론 조장 아닐까

어제 하루 종일 뉴스매체들을 뒤덮은 말은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다”와 “용서한 것 없다”였다. 용서라는 말의 쓰임새 하나는 피해자에게 가해자가 해야 하는 말이다. 가령 전두환이 광주 5·18 희생자들에게, 그리고 n번방 운영자 조주빈이 성착취 피해자에게 해야 할 말이다. 두 번째 쓰임새로는 생살여탈권을 장악당한 약자가 강자에게 구걸하듯 애원할 때 쓰는 말이다. 물론 이 두 경우는 당연히 아니다.

경향신문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장

그렇다면 세 번째 용례일까. 내게 가장 익숙한 표현인데, 신을 대리하는 성직자에게 신자가 종종 사용하는 말이다. 이때 신자는 흔히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다. 성직자는 신을 대리하는 자처럼 연기하고, 신자는 간절함을 과시하듯 무릎 꿇는 행위로 그 모든 죄를, 생각나지 않는 것들까지 모두 퉁쳐서 용서를 빈다.

이런 경우인가? 그러려면 몇 가지 가정이 필요하다. 용서의 주체가 스스로를 사면권을 가진 자 혹은 위임받은 자라고 생각해야 한다. 자신을 신적 주체로 자임하거나 절대적인 도덕적 우월감을 가졌다고 확신할 때 그렇게 말한다. 또 그이의 용서라는 말이 일으키는 담론의 효과를 공유하는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자는 그런 공동체의 일원이어야 한다.

관련 기사들에 의하면 이용수 할머니와 그이의 측근들이 그런 표현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아마도 이들이 그런 교주와 신자공동체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한편 윤미향 당선자 자신이 그렇게 말했는지는 기사만으로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도 그런 공동체의 신자로 보이지는 않는다. 만약 그런 공동체가 있다면 그이는 그 외부자다.

하여 내 생각에는 세 번째 쓰임새도 아니다. 물론 우리가 쓰는 말들이 항상 논리정연하지는 않다. 해서 어울리지 않는 말을 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면 그런 표현을 하루 종일 실어날랐던 기자들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타 공인 언어 전문가들 아닌가. 한데 그들은 왜 이 말이 이상하지 않았을까? 무엇에 대해 용서를 비는지, 무엇 때문에 용서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해야 하지 않는가? 왜 당연히 안다는 듯이 그냥 그 말을 그대로 옮겼을까.

어쩌면 그들도 말했는데,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호들갑 떤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도 평생 글을 써왔던 사람이니, 내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의 말들이라면 다른 많은 이들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법하다. 그런데 그 표현이 하루 종일 족히 수천번쯤 언론을 통해 반복적으로 옮겨졌다.

신학자의 입장에서 괜한 걱정을 말해보려 한다. 나는 용서라는 말의 세 번째 쓰임새의 위험성에 대해 과민하다.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설명도 없고 번안 작업도 없으며 해석하지도 않은 채 이런 말이 수없이 회자되면 그 말에 취해버리는 이가 생길 수 있다. 사이비 교주가 그리고 독재자가 그렇게 탄생한다. 그들은 홀로 별나서 그렇게 된 게 아니다. 그들이 얼떨결에 쓴 말을 마치 무슨 마력을 지닌 것처럼 세상이 폭발적으로 되뇌고 실어나를 때, 그런 담론이 일으키는 광풍의 마력을 감각적으로 체감할 때 스스로를 오인한 자가 사이비 교주이고 독재자가 된다.

어쩌면 정의기억연대 자체가 이런 용서의 종교적 담론화의 위험성을 자초한 장본인일 수도 있다. ‘일본군 성노예’라는 표현처럼 일본제국의 야만적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만, 집을 떠나야 했거나 집에서 내몰렸던 여성들, 그들이 겪었던 조선의 가부장적 폭력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그리 눈에 뜨이지 않았다. 또 미군 기지촌의 여성들을 성노예로 팔아버린 한국 정부에 대한 비판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식의 운동이, 다른 피해자들과는 구별되는 특권화된 피해자 담론을 전 사회가 소비하도록 조장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래도 기자라면 그런 ‘용서’라는 말이 이상하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장 kjh559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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