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 5000명 기부 “신문보고 알아”
뒤늦게 “독려 안내문 주중 보낼 것”
메리츠, 노조와 합의만 하고 발표
문 대통령 “재난지원금 전액 기부”
더불어민주당과 경제부총리 등 고위 관료가 먼저 나섰다. 이들의 ‘기부 자랑’은 금세 ‘기부 압박’이 됐다. 대기업에선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하냐”는 고민 섞인 하소연이 나왔다.
덩치(자산 규모)로는 재계 10위권에 맞먹는 농협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5일 농협은 “산하 계열사와 지역 조합 등의 임원·간부 5000여명이 자발적으로 재난지원금 기부에 참여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정작 기부를 해야 하는 당사자는 이런 회사의 방침을 몰랐다. 한 지역 농협 관계자는 “신문을 통해 재난지원금을 기부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개별적으로 의사를 확인하지 않은 채 “농협은 재난지원금 기부에 동참한다”고 발표해 버린 것이다.
농협은 뒤늦게 “이번 주 안으로 임직원에게 재난지원금 기부를 독려하는 안내문을 보낼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성희 농협중앙회장이 이미 “기쁜 마음으로 동참한다”고 밝힌 뒤다. 대통령이 먼저 나서고 회장이 뒤쫓는 결정을 직원들이 거스를 수 있을까.
지난달 메리츠금융그룹도 연봉 5000만원 이상 임직원 2700여 명 전원이 재난지원금 기부에 참여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정작 개인의 동의 없이 회사와 노동조합 합의만으로 결정된 사안이었다. “자발적인 기부가 아니다”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사측은 직원이 기부에 참여하더라도 혹시 재난지원금이 필요하면 회사가 해당 금액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금액 보전을 요청할 사람이 진짜 있다고 믿는 것인지 의아하다.
애당초 재난지원금은 기부 여부를 놓고 다툴 사안이 아니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어려움을 겪는 계층에게 신속하게 지원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총선을 앞둔 여당이 정부의 50% 지급안을 100%로 바꾸면서 모든 게 꼬였다. 3조4000억원의 나랏빚을 또 내야 했다. 구멍을 메우려다 보니 기부가 정책 보완 수단이 되는 ‘웃픈’ 상황이 연출됐다.
지원금을 기부하면 선(善), 안 하면 악(惡)이라는 구도도 함께 짜였다. 자발적으로 선택하라고 해놓고 자신은 기부하겠다고 밝히는 것부터가 ‘관제 기부’의 시작이다. 공직사회에선 이 구도가 더 명확하다. 홍남기 경제부총리의 “당연히 저는 받지 않을 것”이란 국회 답변은 공무원들도 받지 말라는 압박으로 다가갔다.
꼬리가 몸통을 흔든 대가는 크다. 순수한 기부마저도 의심받는 판이 됐다. 안 받아도 될 만한 사람까지 지원금을 줬다가 정부가 되돌려 받는 셈이라 긴급 지원의 취지도 퇴색했다. 기부 논쟁에 소비 진작 효과는 뒷전이다. 차라리 기쁜 마음으로 받고, 여유가 있으면 더 많이 소비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편이 나았다. 관제 기부까지 신경을 쓰기에는 정부도, 국회도, 기업도 할 일이 너무 많은 비상 시기다.
임성빈 경제정책팀 기자 im.soungb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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