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28 (목)

이슈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

[삶과 추억] 총리 때 세번 평양행, 김일성 만나 남북기본합의서 타결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정원식 전 총리

89년 전교조 출범 때 문교부 장관

학생들에게 밀가루 봉변 당하기도

92년 남북비핵화 공동선언도 체결

중앙일보

1992년 2월 제6차 남북 고위급회담을 위해 북한을 방문한 정원식 당시 국무총리(오른쪽)가 평양 금수산의사당에서 김일성 주석(왼쪽)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노태우 정부 시절 국무총리를 지냈던 정원식 전 총리가 12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92세. 1928년 황해남도 재령군에서 태어난 정 전 총리는 서울대 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이 대학 사범대 교수, 한국방송심의위원회 위원장 등을 거쳐 노태우 정부 때인 1988년 12월 문교부 장관이 됐다. 장관이 된 뒤 학원소요 사태와 교권 침해행위, 대학의 부정·비리 등에 엄정 대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1989년 5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창립되자 노태우 전 대통령은 불법으로 선포했다. 고인 역시 “교원의 정치활동은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한 헌법정신에 비춰 인정할 수 없다”면서 전교조를 불법 단체로 규정하고 참여 교사 1500여 명을 해직·파면 조치했다. 이에 반발하며 수업을 거부한 학생들에게 징계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문교부 장관에서 물러나 한국외대, 덕성여대 등에서 강사로 일하던 고인은 1991년 5월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된다. 같은 해 6월 3일 취임을 앞두고 한국외대 대학원에서 고별 강의를 마치고 나오다가 “전교조 탄압주범 몰아내자” “전교조 선생님을 살려내라” 등의 구호를 외치는 학생들에게 포위돼 20분간 계란과 밀가루 세례를 받았다.

이 사건 이후 학생운동권에 대한 여론이 급속히 악화했으며 공안정국이 조성됐다. 국회가 그해 7월 8일 임명동의안을 가결함에 따라 정식 총리에 취임했다.

중앙일보

91년 6월 3일 총리 취임을 앞두고 고별 강의를 갔다가 한국외대 학생들에게 밀가루와 계란으로 봉변당한 정 총리. [중앙포토]


남북기본합의서 서명은 총리 재임 중 최대 업적으로 꼽힌다. 1992년까지 재임하며 세 차례 평양을 다녀왔고, 남북고위급회담 한국 측 수석대표로 김일성 주석을 면담하기도 했다. 1991년 12월 11·12일 서울에서 열린 5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는 연형묵 북한 정무원 총리와 ‘남북화해’와 ‘불가침’, ‘교류협력’ 등을 골자로 한 남북기본합의서를 타결했다. 이어 1992년 2월 19·20일 평양 6차 회담에서 연 총리와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체결했다.

그해 10월 7일 총리직에서 사퇴한 정 전 총리는 민자당 대통령선거대책위원장에 임명돼 김영삼 후보를 지원했다. 이어 제14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장도 맡았다. 1995년 6월 지방선거 민자당 경선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을 물리치고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됐지만, 본선에선 조순(민주당), 박찬종(무소속) 후보에 이어 3위에 그쳤다. 1997년부터 3년간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재직하며 남북이산가족면회소 설치를 제안했고, 혈액위원회를 발족해 혈액 사업 선진화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유족은 부인 임학영 여사와 4녀. 발인은 14일 오전 8시, 장지는 대전현충원이다.

현일훈 기자 hyun.ilhoon@joongang.co.kr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이슈를 쉽게 정리해주는 '썰리'

ⓒ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