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총탄에 아버지 숨진 아픈 가족사 국민에게 알려져
"5·18 정신 국내외 널리 퍼지고 진실 꼭 밝혀졌으면…"
대통령 품에 안긴 김소형씨 |
(광주=연합뉴스) 전승현 기자 = "철없을 때는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때로는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빠, 엄마는 지금도 참 행복하게 살아계셨을 텐데…한 번도 당신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저가, 이제 당신보다 더 커버린 어른이 돼서 비로소 당신을 불러봅니다."
3년 전인 2017년 5월 18일, 제37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장.
머리를 단아하게 뒤로 묶은 김소형씨가 '슬픈 생일'이라는 제목의 추도사를 낭독하는 도중 감정에 북받친 듯 울음을 터뜨렸다.
객석에서 그 장면을 보던 문재인 대통령은 안경을 벗고 손수건을 꺼내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김씨가 추모사를 마치고 무대 뒤로 퇴장하려고 하자 문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위로 올라갔다.
김씨는 무대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직전에야 이를 알아챘고 문 대통령은 김씨를 안으면서 위로했다. 당시 기념식 참석자뿐 아니라 TV로 생중계를 보던 국민들도 눈물을 흘렸다.
대통령 위로받는 김소형씨 |
1980년 5월 18일 태어난 '5·18둥이'인 김씨에게는 기가 막힌 가족사가 있다.
아버지 김재평(당시 29세) 씨는 1980년 당시 전남 완도 수협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 11시께 딸이 태어났다는 전화를 받고 한밤중에 광주로 출발해 그의 동생 집에서 산모와 아이를 만났다.
아버지는 세상을 다 얻은 것만큼 기뻤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김씨가 태어나고 사흘 후인 21일 오후 동생 집 부근에서 총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솜이불로 창문을 막으려고 일어섰다. 그때 유리창을 뚫고 날아든 총탄이 아버지를 앗아갔다.
김소형씨가 아버지의 죽음을 안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보상법'이 제정되면서 어머니로부터 '아버지의 비극'을 처음으로 전해 들었다.
김씨에게 5·18 이란 무엇일까.
김씨는 5일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는 계엄군이 뭔지 잘 몰랐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왜 일어났는지 알지도 못했다"며 "아버지 죽음을 알고 나서 5·18에 관해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민주화운동에 대한 자부심이 생겼다"고 말했다.
김씨는 중학교 3학년 때 '5·18 전국 학생 글쓰기 한마당'에서 자신의 가족사를 써내 대상을 받기도 했다.
아버지 무덤 앞에서 |
조선대 미대에서 조각을 전공하면서 '아버지상(象)'을 만들어보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김씨는 "아버지상(象)을 몇 번 만들어 보려고 했는데 눈물이 나와 안됐다"며 "저도 사실 5·18 유족이지만 5·18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았고, 있는 사실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5·18 행사에 열심히 참석하고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40년이 흘렀고 5·18과 그만큼의 세월을 함께 살았지만 김씨에게도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숙명과 같은 숙제처럼 남아 있다.
김씨는 "5·18의 진정한 의미가 왜곡되지 않고 그 정신이 국내외 널리 퍼지고, 5·18 책임자처벌과 진상규명이 꼭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shch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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