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인조는 ‘향명배금(向明排金)’ 정책을 씀으로써 후금(後金·淸)의 정묘호란(1627년)을 끌어들이고, 병자호란(1636∼1637년) 때는 끝내 청 태종 앞에 꿇어앉는 추태를 보인다. 오늘날 삼전도비(三田渡碑)는 청나라의 신하국임을 만천하에 고하는 민족적 수치로 자리하고 있다.
광해군은 내정 면에서 왜란으로 인해 파괴된 사고(史庫) 정비, 서적 간행, 대동법 시행, 군적 정비를 위한 호패법의 실시 등 많은 치적을 남겼으며, 외교 면에서도 만주에서 크게 성장한 후금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국제적인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는 외교력을 발휘했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를 때부터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당쟁에 빠져 있던 조선의 선비들은 동복형인 임해군과 유일한 적통인 영창대군, 그리고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를 부추기며 반정의 분위기를 계속 몰아갔다. 이에 광해군은 결국 임해군을 유배시키고, 영창대군을 죽게 하고,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유폐(幽閉)하기에 이른다.
인조반정의 정치적 성공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가 지배적이다. 조선은 그야말로 광해군을 통해 세계사적으로 전개된 17세기 무렵의 근대적인 정치혁신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으나 반정으로 인해 구(舊) 정치체제로 돌아감으로써 그 후 서인과 노론의 명분정치로 일관하게 한다. 이러한 구체제는 다시 정조시대 남인들의 실학개혁도 발목을 잡고 수포로 돌아가게 함으로써 끝내 일제식민에까지 연결된다고 보는 것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홀로 차를 즐기는 경우가 많았다. |
한민족은 이상하게도 실리보다는 명분에 매이는 민족이다. 실리와 명분을 택할 때는 항상 명분을 택하는 경향이 많고, 그러한 명분주의는 자신들이 만든 윤리라기보다는 대국(명나라)의 기준을 숭상하는 것인 까닭에 사대주의의 전형이 된다. 백성을 잘살게 하는 것이 정치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데 항상 대국의 윤리적 기준에 맞춰 사는 문화종속 현상을 드러낸다.
문제는 사대주의가 선진문화를 구가하는 문화주의인 줄 착각하는 데에 있다. 사대주의는 결국 남의 기준에 따라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문화종속이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여서 민주주의라고 하지만 미국의 기준에 맞추는 삶에 다름없다.
군주가 정치도 잘하고 윤리적으로도 모범적이면 좋겠지만 현실은 때때로 엇갈리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군주는 비록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을지라도 백성을 잘 먹고 잘살게 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한다. 군주가 자신은 비록 도덕적일지라도 백성을 굶주리게 하면 무슨 소용인가. 그래서 수신과 치국은 다른 것이다. 마키아벨리즘이 거론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조반정 후 많은 서인들이 조정에 다시 출사하게 된다. 이 중에 이름난 차인들을 보면 택당(澤堂) 이식(李植·1584∼1647)·이단하(李端夏·1625∼1689) 부자, 최명길(崔鳴吉·1586∼1647) 등이 대표적이고, 이즈음 이민성(李民宬·1570∼1629), 이안눌(李安訥·1571∼1637), 목대흠(睦大欽·1575∼1638), 조희일(趙希逸·1575∼1638), 정홍명(鄭弘溟·1592∼1650) 등이 좋은 차시를 남겼다.
택당 이식은 당대의 뛰어난 학자이자 문장가로 문풍을 주도하여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이정구·신흠·장유와 더불어 한문 4대가로 꼽혔다. 1610년(광해군 2) 문과에 급제하여 7년 뒤 선전관이 되었으나 폐모론이 일어나자 낙향했다.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에 있는 택당 이식의 묘비. |
이식은 1623년 인조반정 후 이조좌랑이 되었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 실정을 논박하다가 여러 번 좌천되었다. 1642년(인조 20) 김상헌 등과 함께 척화를 주장하여 청나라 군사에게 잡혀 갔다가 돌아올 때 다시 의주에서 잡혔으나 탈출하여 돌아왔다. 이후 대제학·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1647년(인조 25) 택풍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식은 이름난 시인이었던 이행(李荇·1478∼1534)의 현손이다. 이행은 박은과 함께 해동의 강서파(江西派)라고 불렸는데 호는 용재(容齋)·청학도인(靑鶴道人)이다. 1504년 응교로 있을 때 폐비윤씨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충주에 유배되었고,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이조판서·우의정 등 고위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그의 시는 허균 등에 의해 매우 높게 평가되었다.
먼저 이행의 시 두 편을 보자.
“오랜 인연 아직 문자에 다하지 않아/ 늙어도 물질의 화려를 향하는 마음 없네./ 갠 날 홀로 앉아 머리 빗고/ 흙풍로에 불 피워 햇차를 달이네.”
“무엇이 이 외로움 달래는가./ 쓸쓸히 흔들리는 남쪽 언덕 대나무지./ 홀로 건계의 차를 시음하면/ 여기엔 속되게 하는 것이 없네./ 머리카락 휘날리고 북쪽 창에 찬바람 불면/ 갈건을 어찌 술 거르는 데 쓸 것인가.”
이행은 중종반정으로, 현손인 이식은 인조반정으로 복권된다. 조손간에 반정으로 다시 벼슬살이를 하니 당쟁이 얼마나 심하였던가를 짐작케 한다. 이식의 차 정신은 깊은 맛이 있다. 이식의 차시를 보자.
“십 년의 한가한 생활 하루아침에 거두니/ 송죽 그윽한 곳에 사립문만 헛되이 닫혀 있네./ 업후(?侯: 당나라 李泌)의 서가엔 아직 천권의 책이 남았고/ 육우의 차 화로는 작은 배에 넓다네.”
“서헌의 열분 손님 가장 기이해/ 따뜻한 화로는 양 귀밑털을 녹이네./ 눈을 끓여 녹여 작설을 점다하네./ 단판(檀板·박자판)을 두드리는 미인도 있다네.”
“한낮 그림자 진 붉은 대문에/ 늦게 핀 꽃 헤치며 어린 제비 나네./ 홀연히 부엌에서 새 불 피우는 소리 듣고/ 새 물 길어 햇차 달이라 했네.”
“햇차 한 잔에 모든 근심 씻어내니/ 어젯밤에 꿈꾼 동강이 유유히 흘러가네./ 양 언덕에 복사꽃 비친 봄 강물 넘쳐 흐르고/ 풍로와 죽연은 돌아가는 배에 기대어 있네.”
“녹주에게 차 달이게 하고/ 소파에게 술 붓게 하고 시 읊겠노라./ 화청지에 목욕보다 더 좋으리./ 촉의 잔도 생각하면 괴로울 테니까.”
이식은 문장의 짜임새를 정교하게 다듬는 것을 장기로 삼았다. 그의 시는 간결하고도 품격이 높고 꾸미지 않은 것 같은 데서 우아한 흥취를 느낀다. 그는 5언 율시를 가장 잘 썼다. 그는 소설 배격론을 주장할 정도로 시(詩) 마니아이다.
이식의 아들 이단하도 훌륭한 차시를 남겼다.
“돌 사이 샘물 사랑하고/ 소나무 아래 대(臺)를 아낀다네./ 산봉우리엔 구름이 걸려 있고/ 뜰의 눈은 쓸어 쌓아 두었네./ 불경은 새로 상자에서 꺼내 들고/ 찻 사발은 사그라진 재(灰) 위에 있네./ 그윽한 심경은 묘유에 이르는데/ 밤 종소리는 어이 시끄럽게 들리는가./ 봉우리 둘러진 속에 절 하나/ 참으로 아름다운 세계로다./ 밥 반찬의 나물은 겨울 나물이고/ 자정에 따온 샘물로 차를 달이네.”
“시(詩) 짓기를 술 겨루기 없이 하는 것은 많지 않네./ 술은 흥이 지나면 병폐가 되니 어이하리./ 제일 좋은 것은 문 닫고 한가로이 앉아/ 눈(雪) 물로 차 달이고 물 끓는 소리 듣는 것일세.”
시를 사랑하는 품이 범상치 않다. 자정에 맑은 샘물을 떠서 차를 달이는 정성은 지극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덕수(德水)이씨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차 정신은 이행·이식·이단하를 통해 읽을 수 있다. 이들 이외에도 우리나라 선비 가문에는 대대로 차를 이어온 가문이 적지 않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덕수이씨들이 대대로 묘를 써온 세장지인 경기 양평군 양동면 쌍학리에는 이식과 셋째아들 이단하 등의 묘소가 함께 있다. 묘역 아래쪽 길가에는 1749년(영조 25)에 세워진 ‘덕수이씨세장지비’가 자리 잡고 있다.
또한 묘에서 서쪽으로 180m 떨어진 곳에는 택당 이식 선생이 1619년(광해군 11)에 제자와 자손들을 교육하고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건립한 택풍당(澤風堂·양평군 향토유적 제16호)이 있다.
최명길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청나라를 배척하는 여론에 맞서 주화론(主和論)을 펼친 인물로 현실적인 외교정책을 추진, 국란을 타개한 인물이다. 청나라에 항복문서를 초안한 인물이다. 그는 심양에 다녀와서 영의정이 되었다.
“깊은 밤 외로운 객사에 촛불 켜니/ 차 끓인 화로엔 아직 온기 남아 있네./ 아름다운 시구 제목을 만나면 고치지만/ 봄술 처음 익으면 누구와 함께 개봉을 하리.”
“바위 아래 감천 물 길어/ 강남의 늦은 차 달이네./ 한 잔에 병이 놀라 달아나니/ 청려장 짚고 들판을 쏘다니고 싶네./ 석양에 산촌 객점에 들어/ 이끼 쓸고 솥 걸어 차 달이네./ 바위 사이 눈 쌓인 깊은 골짜기/ 얼음 아래 찬물 흘러 모래 위로 나오네.”
“샘물로 세속소리에 찌든 귀 씻고/ 차로써 익힌 음식에 찌든 창자 축이네./ 남은 생애 이로 족하거늘/ 어찌 도를 굽혀서 상하게 하리요.”
“구름을 재단해서 시구를 얻고/ 월단을 깨뜨려 차를 달이네./ 소나무 얼기설기 초가를 만들어도/ 족히 붉은 칠한 좋은 집만 하다네.”
이민성의 차시를 보자. 병자호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연산의 나그네로 오랜 세월 지냈더니/ 거울 속의 귀밑머리 희끗희끗하네./ 향 피우고 주역 읽으며 현묘함에 빠져들고/ 차 마시고 시 읊으며 마음대로 지낸다네.”
이안눌의 차시를 보자. 이안눌은 꽤나 여러 편의 차시를 남겼다. 병자호란 때 인조를 호송했다.
“밝고 푸른 구름 머무르는 숲에/ 아직 단약(丹藥) 만드는 솥이 있네./ 원하건대 내 선적(仙跡)을 따라 가/ 꽃다운 차 마시며 숲에서 살려 하네.”
“푸른 하늘 깨끗한 냇물로 씻은 것 같은데/ 황혼에 어렵게 옛 누각에 오르네./ 시골 중들과 세속의 벗 보이는데/ 중추의 강에서 둥근달 떠오르네./ 시를 지어 화답하니 새들이 놀라 날고/ 차를 마시며 감상하니 북두가 기울었네./ 홀연히 옛 음산의 시구가 생각나서/ 이 몸 임금님의 은혜에 감격했네.”
목대흠의 차시를 보자. 목대흠의 호는 ‘다산(茶山)’과 ‘죽오(竹塢)’이다. ‘다산’이라는 호를 정약용보다 먼저 쓴 인물이면서 당시 여러 차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곤하게 잠든 아이 깨워서/ 차 속히 끓이라고 노승은 재촉하네./ 멀리 성에서 울리는 새벽 종소리/ 장한 마음 꺾을 수가 없네.”
“텅 빈 창에 대 그림자 일렁이고/ 개울물 소리에 잠을 뒤척이네./ 달빛 밝은데 거문고 소리 청아하고/ 차 마신 스님 절로 돌아갔네.”
조희일의 차시를 보자. 그의 차시는 차를 달이는 과정을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다.
“맑은 새벽 정화수 길어오는 번거로움 피하려/ 벽돌화로에 눈 녹여 햇차 달이네./ 깊은 탕관에서 물결 일어 넘치고/ 찬 소나무에 바람소리 나더니 멀어지네./ 섬섬옥수로 발효차 찻사발 들고 오니/ 메마른 창자 축이고 붓으로 꽃을 그리네./ 글쟁이 당뇨로 소갈증을 지녔으니/ 노동의 차 노래는 정말 사치가 아니네.”
정홍명은 송강 정철(鄭澈)의 아들이다. 아버지를 닮아 시문에 능했다.
“휘몰아치는 눈발 아득한데 날도 저물어/ 어지럽게 부는 바람 굴뚝연기 몰아치네./ 외로운 회포 근심스러워 잠자리마저 추우니/ 혼자서 손수 차를 달인다네.”
“속병으로 먹지 않던 약봉지 찾고/ 아이 불러 찻사발 가져오게 하네./ 뒤늦게 시 읊는데 도움이 되는 걸 아니/ 입 안의 맑은 바람 한 줄기 가을이라네.”
차인들은 당색이 어떻든 간에 자신에게 충실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중후기는 주로 서인들을 중심으로 선비차가 융성하였다.
박정진 객원논설위원·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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