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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9 (수)

이슈 유가와 세계경제

역대급 저유가 시대라는데···국내 휘발유값은 굼벵이 걸음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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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1일 서울 시내 한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L당 1305원에 판매하고 있다.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 서비스 오피넷에 따르면 이날 기준 전국 주유소 평균 휘발유 판매가격은 L당 1384원으로 집계됐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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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박권실(37)씨는 매일 경기도 분당과 서울 광화문을 운전해서 오간다. 지난해 기름값으로 매달 10만원 가까이 썼다. 국제유가가 떨어진 올해 들어서도 별로 달라진 건 없었다. 3월까지 매달 9만원 이상 나갔다. 지난 1일엔 동네 주유소에서 휘발유 20ℓ를 넣고 2만8000원을 냈다. 한 달 전 같은 양을 주유했을 때보다 2000원가량 줄었다. 박씨는 “국제 유가가 지난해 절반에도 못 미치는데 주유소 기름값은 너무 찔끔 내렸다”며 “유가가 내린 것을 체감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올릴 때는 다락같이, 내릴 때는 굼벵이처럼’. 역대급 저(低)유가 시대에 접어들었지만, 국내 소비자는 석유제품 판매가가 떨어지는 반사 이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 유가가 떨어진 만큼 주유소 기름값이 따라 내리지 않아서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 19) 여파로 경제가 잔뜩 움츠러든 상황에서 서민 주름살을 깊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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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가 확 내렸는데, 주유소 기름값은 굼벵이. 그래픽=신재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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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미국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는 배럴당 20.31달러로 거래를 마쳤다. 한 달 전인 3월 2일 WTI 유가(배럴당 46.75달러) 대비 절반도 못 미쳤다. 반면 같은 기간 국내 주유소 휘발윳값 평균은 ℓ당 1523원에서 1384원으로 9.2% 내리는 데 그쳤다. “국제유가가 내려도 말단 주유소에서 기름값을 쥐꼬리만큼 내려 소비자가 체감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미국과 비교하면 더 두드러진다. 미국자동차협회(AAA)에 따르면 미국 주유소 휘발윳값은 갤런(3.78ℓ)당 2달러(약 2460원) 이하로 떨어졌다. ℓ당 650원 이하다. 4년 만에 최저 수준이다. 값도 싸지만, 인하 폭도 가파르다. 미국 내 70%의 주유소에서 갤런당 2.19달러였던 휘발윳값을 2주 만에 2달러 아래로 내렸다. 켄터키에선 갤런(3.78ℓ)당 99센트(약 1200원) 주유소까지 등장했다. 허은녕 서울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는 “산유국인 미국은 한국보다 기름값도 싸고, 유가 하락에 따른 기름값 인하 폭도 가파르다”고 설명했다.

정제ㆍ유통 마진(이익)이 줄자 정유사가 국제유가 하락 속도보다 더디게 국내 판매가를 내린다는 지적이 나온다. 송보경 석유시장감시단장은 “정유사는 ‘마진을 줄여도 기름값 인하 폭이 크지 않다’고 주장하지만 그건 소비자가 판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유업계는 ‘폭리’ 논란에 대해 “한국처럼 기름값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나라도 없는데 기름값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매번 정유사만 몰아붙이는 건 횡포”라는 입장이다. 특히 세금으로 화살을 돌린다. 대한석유협회 관계자는 “국내 기름값의 약 60%가 세금이라 국제유가가 떨어져도 그대로 휘발유 가격에 반영할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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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휘발유 L당 1400원일 경우 세금은. 그래픽=신재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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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착시효과’가 아예 틀린 얘기는 아니다. 휘발유에는 금액과 상관없이 ℓ당 세금이 붙는다. 교통세 529원, 교육세 79.35원(교통세의 15%), 주행세 137.54원(교통세의 26%)에 부가세(판매가의 10%)를 매긴다. 휘발윳값이 ℓ당 1400원이라면 세금만 800원 이상이다. 환율ㆍ시차도 국제 유가 하락 효과를 상쇄하는 변수다. 정유사는 해외에서 석유를 수입할 때 미국 달러화로 사 온다. 원ㆍ달러 환율은 올해 들어 달러당 1100원대에 머물다가 지난달 말부터 치솟아 최근엔 달러당 1200원을 넘어섰다.

석유협회 관계자는 “환율이 오르면 원유를 들여올 때 원화를 더 많이 지급해야 한다”며 “수입한 원유를 국내로 들여와 주유소에 풀 때까지 시간이 걸려 기름값에 반영하는 데 2~3주 정도 시차가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유사는 고유가 시절 대규모 이익을 취해왔다. 세금·환율·시차 이유를 대는 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얘기가 나온다. 석유시장감시단에 따르면 지난달 국제 휘발윳값이 ℓ당 172.89원 내리는 동안 국내 주유소 판매가격은 ℓ당 89.03원 내렸다. 기간을 벌려 1월 2주부터 3월 말까지로 봤을 때도 국제 휘발윳값이 ℓ당 364.05원 내리는 동안 국내 주유소 판매가격은 ℓ당 162.25원 내리는 데 그쳤다.

허은녕 교수는 “주유소 휘발윳값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오피넷’을 만들고, 알뜰주유소가 나오면서 시장이 과거보다 투명해졌다”면서도 “눈에 띄는 휘발유보다 상대적으로 싼 경유는 저유가 인하분을 주유소 판매가격에 덜 반영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서혜 E컨슈머 연구실장은 “정유사가 공급가를 내리더라도 재고 판매 이유를 들어 가격을 따라 내리지 않는 주유소가 있다”며 “2주 정도 시차를 반영하기 때문에 다음 주 가격 추이를 보고 주유하면 좋다”고 조언했다.

세종=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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