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3월 26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사건의 근본적인 해결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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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늑대’·‘악마’와 같은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이런 용어는 가해 행위를 축소하거나, 가해자를 비정상적인 존재로 타자화(他者化)하여 예외적 사건으로 인식하게 합니다. 성범죄는 비정상적인 특정인에 의해 예외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지난 3월 24일 전국언론노동조합 성평등위원회·민주언론실천위원회가 긴급지침을 발표했다.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인 조주빈씨의 행적을 조명하며 ‘두 얼굴의 악마’로 묘사하는 보도가 사건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고 경계한 것이다. 조씨는 스스로 “악마 같은 삶”이라며 서사를 만들어냈지만,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사건은 그 안에 있던 수십만 명이 만들어낸 결과다. 여성계는 “조씨의 평범함은 곧 성폭력의 평범성”이라고 말한다.
악마도, 예외적 사건도 아냐
n번방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터진 일이 아니다. 디지털 성범죄는 창구만 달리하며 반복돼왔다. ‘소라넷’ 폐쇄, 웹하드 카르텔, 유명 연예인의 단체채팅방 공개, ‘웰컴투비디오’ 운영자 검거, 텔레그램 n번방 사건까지…. 디지털 성범죄 이슈가 떠오를 때마다 불법 촬영물은 자리만 옮기며 기승을 부려왔다. 지금도 누군가는 텔레그램에서 다른 플랫폼으로 무대를 옮기고 있다. 불법촬영물을 만들어 공유하고, 시청한 이들은 여성을 인간이 아닌 상품으로 보며 강간문화를 유지해온 평범한 일상 속에서 양산됐다.
n번방은 과거 음란사이트와 운영 수법과도 닮았다. 조씨가 운영한 박사방은 영상을 무료로 볼 수 있는 ‘맛보기’ 방과 3단계 유료방으로 나뉘었다. 유료 대화방은 영상 수위에 따라 입장료가 20만원에서 150만원으로 점점 높아졌다. 거래는 가상화폐로 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스폰 알바 모집’ 같은 글을 올려 피해자를 유인했다. 피해자 얼굴이 나오는 나체 사진을 받은 뒤 이들을 협박해 성착취 불법촬영물을 찍게 했다. 성범죄는 ‘놀이’마냥 이뤄졌다.
강간문화에 뿌리를 둔 성폭력은 대학생·기자·연예인 등의 단체채팅방에서도 되풀이됐다. 피해자들은 신상공개에 대한 두려움으로,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시선 때문에 피해를 쉽게 드러내지 못했다. “내 딸이 n번방 같은 곳에는 못 가도록 가르칠 것”이라는 한 중년 남성의 인식은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드러낸다.
민우회는 성명에서 “불법촬영물을 공유하고 동료 여성에 대한 성적 모욕을 일삼는 학교·회사·기자 등등의 남성 단톡방이 n번방과 무관한가. 약물을 이용한 성범죄 모의를 청년기의 일화쯤으로 치부하고, 교사에 대한 성적 판타지를 버젓이 출판한 저자들을 옹호하는 태도는 과연 n번방과 얼마나 다른가”라고 말했다.
박아름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단톡방 사건이 터질 때마다 (디지털 성범죄가) 특정 집단의 문제인 것처럼 이야기돼왔는데, 사실 광범위한 사회문제라는 게 드러났다고 본다”며 “조주빈이라는 운영자의 개인적 서사에 집중하고 그 과정에서 가해자 주장을 되풀이하기보다 왜 그동안 이러한 성폭력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는지, 어떻게 문화를 바꿔나갈 수 있을지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활동가는 “돈을 주고 성착취물을 사는 것이 성욕과 호기심 때문이라고 여기는 성문화가 바뀌지 않고서는 디지털 성범죄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했다.
신성연이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활동가는 3월 26일 기자회견에서 “온라인 성착취 네트워크를 끝내려면 조주빈이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그는 악마가 아니라 숱한 성착취 범죄자 가운데 하나이며 시민이 되기에 실패한 남성”이라고 했다. “조주빈의 외모도, 가족도, 친구도 그가 입은 옷도 전혀 궁금하지 않습니다. 궁금한 건 오로지 검찰과 법원과 사회가 그를 어떻게 벌할지입니다.”
더 이상 ‘뒷북’은 없어야
n번방 이용자들에겐 ‘잡힐 리 없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 배경엔 디지털 성범죄를 가볍게 여기고 취급한 사회 분위기가 자리 잡고 있다. 디지털 성범죄 가담자 대부분은 수사망에서 빠져나갔다. 사법기관은 붙잡힌 운영자들에게도 쉽게 면죄부를 줬다. 전에는 생각하지 못한 범죄형태가 등장하는 데 법률과 처벌 수위는 따라가지 못했다. 피해자와 피해에 노출된 여성들은 두려웠고 답답했다.
디지털 성범죄는 ‘폭력’의 문제가 아닌 ‘음란물’의 문제로 인식됐다. 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해 인간의 얼굴을 합성하는 딥페이크 영상물 처벌을 두고 국회의원과 고위공무원들 사이에선 “자기는 예술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만들 수 있다”, ”청소년이나 자라나는 사람들은 자기 컴퓨터에서 그런 짓 자주 한다”는 말이 오갔다.
불법촬영물 제작·유포자의 처벌 수위를 높이고 대화방 관전자(회원)까지 ‘공범’으로 처벌해야 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박아름 활동가는 “n번방 사건을 두고 빗발치는 각종 청원과 요구는 그간 쌓인 분노와 불신의 결과다. 많은 이들의 공분은 n번방이 범죄임을 알리는 효과가 있었지만, 처벌을 강화하고 문화를 바꾸는 운동이 지속되지 않으면 단순 해프닝으로 끝나버릴 수 있다”고 말했다.
사법당국과 국회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찰은 ‘디지털 성범죄 특별수사본부’를 꾸리고 대대적인 수사에 나섰다. 성착취물 생산자·유포자는 물론 가담·방조자까지 추적할 방침이다. 법무부도 관전자 등 가담자 전원을 엄정 조사하고 책임에 따라 강력히 처벌하도록 검찰에 지시했다. 국회에선 여야 없이 ‘n번방 방지법’ 제정에 나섰다.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착취물은 소지만으로도 처벌할 수 있다. 하지만 성인 대상 성착취물은 제작·유포에 관여하지 않고 소지만 했을 경우 처벌이 어렵다. 서혜진 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더라이트하우스 법률사무소)는 “처벌의 공백이 느껴지는 부분을 메우기 위해서는 새로운 입법을 통해 가벌성을 확장해야 한다. 그 범위와 수위는 충분한 사회적 논의를 거쳐 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형벌은 가장 마지막 수단이 돼야 하지만, 많은 시민의 요구를 무시할 순 없다. 분명 고민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노도현 기자 hyu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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