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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6 (목)

[이지누 칼럼]역병이 지나간 후 남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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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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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경극의 독특한 얼굴 화장을 화검이나 검보라고 한다. 그런데 화검은 ‘상처 자국 또는 반점이 있는 얼굴’을 뜻하는 화면(花面)이라는 단어와 같이 쓰인다. 화면은 곧이곧대로 ‘꽃처럼 아름다운 얼굴’이다. 그러나 반어적으로도 쓰이는데 <임하필기>에 보면 ‘천연두가 심하여 얼굴에 마맛자국이 생긴 것을 일컫는다’고 되어 있다. 원나라 사람들 중 불화(不花)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유난히 많은데 불화는 ‘꽃이 피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꽃이 피지 않는 장소가 화단이나 정원이 아니라 그 이름을 가진 이의 얼굴이다. 천연두를 많이 앓았던 원나라와 금나라 사람들이 이름 자체에 부적의 의미를 담아 화면이 되지 않기를 기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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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두가 창궐했던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역병의 시대를 어떻게 넘겼을까. 당시는 지금처럼 한순간 일어났다가 지나가는 일이 아니라 ‘늘’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잦거나 반복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전국으로 번진 마마는 지금의 ‘코로나19’처럼 많은 사람들의 생활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사대부들은 우선 발병 지역을 피하고 봤다. 미수 허목은 경기도 연천의 은거당에 머물렀는데 1678년 낭선군 이우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머물던 마을에 역병이 돌아 10여명이 죽으니 하릴없이 궁벽한 산골짜기로 몸을 피했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거처를 급히 옮기느라 읽던 책은 물론 필연조차 챙겨오지 못해 심사를 달랠 소일거리가 없다고 하소연한다.

그보다 12년 뒤인 1690년 3월에는 전남 나주의 회진마을에 살던 창계 임영이 세 살배기 아들을 품에 안고 10여명의 식솔들과 함께 부랴부랴 마을을 떠났다. 마마가 덮쳤기 때문이다. 그가 몸을 피한 곳은 둘째 형님인 임정이 살던 영산강 하구의 강마을인 무안군 일로읍 사교마을이었으니 그곳까지 1박2일의 뱃길이었다.

명재 윤증은 1708년 3월 역질이 번지자 충남 예산의 선영과 마주 보는 곳에 있던 사찰인 정수사로 거처를 옮겼다. 정수사는 중종과 문정왕후의 3녀인 인순공주의 원당이었지만 후에 윤증 집안이 분암으로 삼아서 종회를 열기도 하고 가문의 강학 장소로 사용하기도 한 곳이다. 윤증은 몸을 피해 ‘정수사에서 역질을 피하다’라는 시를 지었는데 종일 말 한마디 나눌 사람조차 없는 외로움을 토로했다.

동계 정온은 온 집안이 역병에 걸려 큰아들인 정창시의 장례를 여섯 달이 지나서야 치렀으며, 목재 홍여하는 1664년에 종조숙부인 합강정 홍호약의 제문을 썼는데 홍호약이 숨을 거둔 지 열두 달이 지나서 장례를 치른다며 애통해한다. 홍호약이 역병으로 숨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숨을 거둘 당시 역병이 돌아 누구 하나 모이질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며 너무도 슬프고 죄를 지었다며 글을 시작한다.

성리학자인 녹문 임성주는 1784년 7월, 셋째 아우인 운호 임정주에게 보낸 편지에서 딸의 혼례를 치른 후 잔치에 모였던 손님들이 돌아가자 아들이 갑자기 역병 의심증세를 보였다며 한탄한다. 이에 아들을 기거하던 집에 둔 채 가족들과 자신은 집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또 하나의 집을 구해 형과 어머니가 간호를 했는데 두려움이 컸다고 고백한다. 그런가하면 옥담 이응희는 1623년 4월 처와 자식이 모두 염질에 걸렸다. 이에 함께 살던 어머니를 모시고 집을 떠났다가 석 달이 지나서야 돌아왔다고 하니 남거나 떠났던 이 모두 두려움에 떨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또 무명자 윤기는 ‘협리한화’라는 글에서 생필품이 동난 것에 대해 말한다. 1815년 지금의 양평으로 잠시 거처를 옮겼는데 기근과 역병으로 인해 소금·젓갈·땔나무·생선·신발 같은 것들은 돈이 있어도 살 수 없고 물가가 몇 곱절이나 뛰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 역병이 번지면 모두 살기 힘들었다. 오죽하면 앞에 말한 임성주가 아우에게 보낸 편지의 첫머리에 “목숨을 건지느라 겨를이 없다”고 썼을까.

그 와중에 지금의 우리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거리 두기’처럼 역병이 창궐한 지역에 산다는 이유로 중요한 강회에 참석하지 않은 사대부도 있었다. 그는 대산 이상정으로 1729년 고재 이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퇴계 이황을 배향한 여강서원에서의 강회가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 묻는다. 그러곤 강회에 참석자들이 모두 역병을 꺼리는데 자신의 거처가 역병 창궐 지역에 있어 강회에 참석한다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생기고 말 것만 같아 행장을 꾸려 출발하려다 스스로 멈췄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선조들은 나름대로 굳건하게 견디고 이겨냈으며 역병은 또 하나의 문화를 만들기도 했다. <삼국유사>의 처용도 그렇거니와 962년인 고려 광종 13년에는 쇠로 만든 당간이 용두사에 세워졌다. 청주의 향리 김예종이 역병인 염질에 걸린 후 쾌차를 바라면서 시주해 건립된 것인데 국보 제41호 용두사지철당간이 그것이다. 조선에서는 역병이 창궐하던 17~18세기에 마을과 사찰 어귀에 역병을 물리치기 위한 장승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길가에 서서 이정표 노릇을 하던 장승이 주로 남도지방 마을과 사찰 어귀의 지킴이로 변신을 시작한 것이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것을 견디고 이겨내려 갖가지 지혜를 짜내기 마련이고 그 결과는 이처럼 하나의 문화로도 남는다.

예로부터 마마를 큰손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코로나19’도 마찬가지다. 그것도 결국 돌아갈 손님이지만 그가 어떤 상처와 문화를 남기고 물러갈 것인지는 우리가 하기에 달려 있다. 그래서 보다 더 현명하고 배려 깊은 대처가 무엇보다 요구되는 지금이다. 모두 강건하고 지혜롭게 스스로의 자리를 지키며 ‘코로나19’가 완전히 떠날 때까지 견디기를 응원한다.

이지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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