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命人) ㅣ <회사를 해고하다> 저자
내가 시골에 살러 와서 처음 배운 것은 풀·꽃·나무들의 이름도 농사도 아니었다. 지난 10여년간 내가 배워서 나도 모르게 따라 하며 몸에 익은 건, 바로 이런 것.
시골 마을에서 살 집을 구하려면 여전히 알음알음 사람들을 통해야 한다. 지인의 몇 다리를 건너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이 이 마을 저 마을에 우리가 살 집을 알아봐주었다. 우리는 집을 짓기까지 임시로 살 집을 무상으로 빌렸고, 집터를 구할 때도 나서준 사람들을 꼽자면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무작정 빈집이 있나 알아보러 들어간 마을에서조차 내 손을 꼭 붙잡고 “어매, 이 고운 손으로 뭐 한다고 시골에는 살러 왔당가, 시골에 살믄 여자는 생고생인디” 하시더니 빈집을 보여주러 다녀주던 할머니는 가는 마을마다 계셨다.
아직 땅을 구하지 못해 집을 짓지 못했으니 어느 곳에 농사를 지을지도 알 수 없던 때, 우리가 살 집을 구해주신 김샘은 “자네들은 아직 철도 모르는 철부지들이니 조급해하지 말고 철이나 배우라” 하시며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 집에 먹을 것을 나르셨다. 하루는 들에서 하루는 산에서 하루는 바다에서 쉴 새 없이 먹을 것이 왔다. 집주인 어른은 추수했다고 쌀을 한 가마니나 나눠주시고, 어느 날 아침 빨래라도 널러 마당으로 나서면 현관문 앞에 누가 갖다 놓았는지도 모를 고구마 한 자루가 있었다. 고구마 주인을 찾고 보면, 정류장에서 시간도 먼 버스를 기다리고 계시기에 어차피 나가는 길에 태워드린 이웃 할머니다. 일손이 부족해 쩔쩔매는 농번기에 안타까워 서툰 손으로 일을 좀 거들고 나면 1년 먹을 마늘이나 깨, 고추가 생겼다.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에 밭에서 일하고 있는 아랫집 할머니를 마주치면 어김없이 뭐라도 내 손에 들려 보내시고, 마을 길에서 누가 불러 뒤돌아보면 밭에서 풀을 매다 말고 냉이며 달래며 갖고 올라가라 소리 지르는 마을 친구도 있었다. 심지어 묵나물이며 장아찌며 만날 때마다 반찬을 손에 들려주는 언니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우리 부부는 늘 받기만 하고 나눌 게 없어 쩔쩔매면서도 “우리, 농사 안 지어도 충분히 먹고 살겠어” 하고 농을 하곤 했다.
내가 옆지기에게 “어이, 유튜브 보고 집 짓는 남자!”라고 놀리면 옆지기는 나에게 “왜, 블로그 보고 옷 짓는 여자!”라고 받아친다. 옆지기가 2년째 혼자서 집을 짓고 있고, 내가 가끔 옷을 짓거나 소품이나 천연비누 같은 걸 만들어 쓴다고 하면 사람들은 우리 부부가 뭔가 대단한 기술이라도 가진 줄 아는데, 우리는 둘 다 기술이고 경험이고 쥐뿔도 없다. 심지어 보통의 남들만큼도 못한 손재주를 지녔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건 자기가 가진 기술과 경험을 아무 대가 없이 나누는 사람들 덕분이다. 가짜뉴스를 유포하고 악플을 다는 사람들로 몸살을 앓는 인터넷 세상엔 그런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다. 생전 처음 보는 식재료를 받았을 때 당황해서 검색을 하면 어김없이 과정 샷을 곁들여 조리법을 올려놓은 사람이 있고, 옷을 짓든 집을 짓든 무엇을 만들려고 하든 배워가며 따라 할 수 있도록 전 과정을 꼼꼼하게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그런 정보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감탄한다. 직접 그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때가 많은데 언제 일일이 사진까지 찍어가며 실패담에 시행착오의 경험까지 그리들 나눠주는지.
지면이 부족해서 미처 다 쓰지 못하는, 이것은 끝도 없는 이야기. 누구도 이 엄혹한 자본주의 체제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지만 어쩌면 이것은, 자주 지옥처럼 느껴지는 이 세상의 작은 숨쉴 틈. 그래서 나는 오늘도 사부작사부작 꼭 필요한 사람들과 나눌 마스크를 만들기 위해 재봉틀을 돌린다. 내가 올린 마스크 사진을 보고 몸을 일으켜 누구는 손바느질을 시작했다 하고, 누구는 먼지 쌓인 재봉틀을 꺼냈다 하니 마치 이어달리기 같은 연쇄반응에 나도 다시 힘을 얻는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했던가. ‘희망은 살아 있는 자의 의무’라고.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느닷없이 ‘사회적 거리’를 두게 했지만, 나는 이런 사람들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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