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중순 핀란드 헬싱키 중앙역에서 트램으로 15분 이동하자 한적한 주택가에 회색빛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이 건물 6층에 자리 잡은 서비스센터헬싱키(Service Centre Helsinki).
"한 시간쯤 있다가 물 드시는 것 잊지 마세요." 한 사회복지사가 수다를 떨다가 대화를 마무리한다. 이날 같이 대화한 노인 6명은 헬싱키 곳곳에 흩어져 살지만 태블릿PC를 통해 하나가 됐다.
23일 서울 시내 한 카페에서 시민들이 제29차 비전코리아 국민보고대회 디지털 언팩 영상을 보고 있다. [김재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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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스센터의 원격 의료실에서는 좀 더 면밀한 대화가 이뤄진다. 모니터 앞에 앉은 간호사는 영상으로 연결된 노인에게 처방된 약은 잘 먹고 있는지, 잠은 잘 자는지, 식사는 제때 하는지 등을 질문했다. 이곳에 상주하는 간호사는 50여 명. 영상으로 환자 상태를 콕 집어내야 하기 때문에 실전 경험이 풍부한 간호사들이 주축을 이룬다.
헬싱키시는 2015년부터 태블릿PC를 이용한 원격돌봄서비스를 시작했다. 간호사나 간병인이 가정 방문 시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회당 45유로였지만, 지금은 단 5유로로 서비스 이용이 가능하다. 간호사들의 가정 방문을 하는 횟수도 한 달에 30회에서 4회로 줄어들었다.
한국은 2000년 원격 진료 서비스 도입으로 원격 돌봄 서비스의 기틀을 처음 마련했지만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상용화되지 못한 채 시범 서비스에 머물고 있다. 원격 진료가 의료 민영화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 정치적인 반대에 직면했다. 최근 코로나19 사태에서 한시적으로 전화 진료와 처방을 긴급 허용했지만 의료 현장에선 혼선이 빚어졌다.
원격의료를 위한 기본적인 플랫폼조차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원격의료 등 디지털 헬스케어와 관련해서는 사실상 '갈라파고스'에 가깝다는 평가다. KPMG에 따르면 글로벌 100대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에 한국 기업은 단 한 곳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디지털 헬스케어 핵심 사업모델인 원격의료, 소비자직접의뢰(DTC) 유전체분석 등이 국내에서 불법인 탓이다. KPMG는 글로벌 100대 디지털헬스케어 기업이 한국에서 사업을 하면 63곳이 영업에 제한을 받거나 불법으로 처벌받는 것으로 분석했다. 2021년 412억달러(약 51조원)로 커질 글로벌 원격의료 시장에 한국은 사실상 눈을 감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도 방문 요양, 방문 간호, 주야간 보호 등 예산을 지출한다. 노인장기요양보험의 '재가급여비' 항목이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2017년 재가급여비 지출은 2조6417억원에 달한다. 최근 5년간 수급자 1인당 연평균 재가급여비(584만원)와 2020년 예상 수급자 규모(56만4000명)를 감안하면 올해 관련 지출 규모만 3조3000억원에 육박할 전망이다. 핀란드처럼 재가 방문 시 비용을 9분의 1로 줄일 수 있다면 연간 2조9000억원가량의 예산을 아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재활과 돌봄, 서비스 관련 로봇 전문가들은 돌봄 서비스의 효율성 증대를 위해 노인장기요양보험 등과의 연계 강화 방안을 제안하고 있다. 원격 돌봄 서비스를 도입해 서비스 비용을 낮추면 '1인 1로봇' 시대도 가능하다는 구상이다. 박일우 한국로봇산업진흥원 로봇보급사업단장은 "최근에야 배변케어 로봇과 어르신 말동무를 위한 반려로봇 보급이 시작됐다"며 "일본처럼 정부 보조금 지급 등으로 로봇 구입 가격을 낮춰야 하고, 기업들 스스로도 간편하고 가격이 저렴한 로봇을 개발하는 등 자구 노력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실제 일본 정부는 올해 돌봄 서비스를 받는 대상자 중 80%가 로봇의 지원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전기차 보조금과 같이 로봇 구입 가격의 80%를 정부와 지자체가 보조하고, 20%를 소비자가 부담하게 하는 구조다. 노인 돌봄 서비스의 질을 높이고, 2026년 271억달러(약 34조원)로 커질 글로벌 개인용 로봇 시장을 선점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풀이된다.
고령 선진국 유럽과 일본에선 고령화 도시 내 일상생활 공간에서 연구개발이 이뤄지는 '리빙랩(살아 있는 실험실)'을 통해 정보통신기술(ICT)과 로봇산업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청소 로봇과 독일의 가사도우미 로봇이 대표 사례다.
최종 사용자(End User)가 제품 개발에 참여하는 구조로, 내수시장뿐만 아니라 수출시장까지 공략하며 보폭을 넓혀가고 있다.
김영선 경희대 노인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만 고령화 문제로 고민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리빙랩에서 평가받은 제품들은 수출 시장을 뚫는 데 활용될 수 있다"며 "중국도 2025년이면 60세 이상 인구가 3억명이 되고,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아세안 주요 국가들도 빠른 속도로 고령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시장을 앞서 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특별취재팀 = 한예경 팀장 / 홍장원 기자 / 박대의 기자(일본) / 유준호 기자(프랑스·네덜란드·덴마크·핀란드) / 김문영 MBN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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