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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 (화)

[무비클릭] 찬실이는 복도 많지…목말라서 꾸는 꿈은 행복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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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이코노미

드라마, 멜로/ 김초희 감독/ 96분/ 전체 관람가/ 3월 5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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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고 싶어도 마음대로 떠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하물며 그것이 평생을 걸고 공부하고 자신을 내던져 이룩한 나의 업(業)이라면 어떨까.

찬실(강말금 분)이의 상황이 딱 그렇다. 그는 자신의 평생을 걸고, 예술영화 감독인 지 감독(서상원 분)의 영화만 만들어온 프로듀서다. 하지만 지 감독이 사망하고 주변 사람들은 더는 찬실을 찾지 않는다. 생활고에 시달린 찬실은 평소 잘 알던 배우 소피(윤승아 분)의 집을 찾아가 가사도우미를 하며 연명하기로 한다. 프로듀서와 배우의 관계에서 집주인과 가사도우미 관계로 변한 만큼 찬실에게는 소피와의 모든 일이 버겁기만 하다. 그리고 찬실은 그렇게 영화를 잊으려 한다.

첫 장편영화를 연출한 김초희 감독은 영화의 찬실처럼 거장 예술감독 홍상수의 ‘전원사’에서 오랫동안 일한 프로듀서 출신이다. 영화의 지 감독은 홍상수를 모티브로 했다. 영화는 초반에 지 감독을 죽이면서 시작한다. 홍상수의 그림자를 벗어나 자신의 영화를 펼쳐내는 김초희 감독이 그린 해학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찬실이 영화를 떠나자 그때부터 영화가 찬실에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영화 같은’ 일이 주변에서 벌어지기 시작한다. 찬실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운명적인 남자를 만난다. 찬실의 하숙집에서는 장국영(김영민 분) 귀신이 나타난다. 게다가 하숙집 주인 할머니(윤여정 분)의 딸이 썼다는 빈방에는 1990년대를 관통한 시네필(영화팬)들의 추억의 물건이 가득하다. 가득 쌓인 비디오 테이프들, 이제는 추억이 돼버린 영화 잡지 ‘키노’, 故 정은임 아나운서의 ‘FM영화음악’ 등이다. 그만 영화를 떠나고자 하는 찬실에게 영화 그 자체가 다가온다.

누구나 사랑하는 일을 떠나서 살 수는 없다. 술을 마시며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 같다’고 말하는 찬실은 어쩔 수 없는 영화광이다. 찬실의 사랑은 물거품처럼 사라지지만 사랑은 떠나도 영화는 남는다. 어느덧 찬실은 살아가는 것과 영화를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잡지와 비디오 테이프는 버릴 수 있어도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고, 보고 싶고, 사랑하는 일을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을.

꿈을 잃은 사람, 꿈을 꿨지만 무수히 많은 벽에 부딪혀 좌절한 사람들이라면 찬실의 입장에 쉽게 공감할 수 있을 터다. 영화는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는다. 마흔 살 먹도록 연애 한 번 못해보고 일만 하고 살았다는 찬실의 한탄이 귀엽고 우스우면서도 애틋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 열정과 좌절이 모두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리라.

잠시 업을 떠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업이야말로 나를 규정하는 것임을 영화는 강조한다. 영화를 떠나 있던 찬실은 고백하듯 말한다.

“목말라서 꾸는 꿈은 행복이 아니라고.”

매경이코노미

[라이너 유튜버 유튜브 채널 ‘라이너의 컬쳐쇼크’ 운영]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 2051호 (2020.03.25~2020.03.3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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