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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 (일)

["존경하는 재판장님" 사법농단, 법정의 기록(22)]판사 비위 첩보 받은 행정처, 언론 보도 막으려 재판까지 미루며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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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위 의혹 은폐

경향신문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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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판사가 뇌물사건 피의자와 밥과 술을 먹고 골프를 쳤다.’ 2015년 9월7일 대검찰청이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게 보낸 2쪽짜리 문서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지역 건설업자가 체포영장 발부 당일 식당과 유흥주점에서 부산고등법원의 문모 판사(현 변호사)를 만났고, 그 전에도 두 사람이 1년에 4번꼴로 골프 라운딩을 하는 등 접대가 있었다는 것이다. 건설업자는 조현오 전 경찰청장에게 뇌물을 준 혐의자였다. 법관윤리강령 3조 1항은 “법관은 공평무사하고 청렴해야 하며, 공정성과 청렴성을 의심받을 행동을 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한다. 법관윤리가 잘 지켜지는지 감시해야 할 법원행정처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법원행정처는 문 전 판사의 비위 의혹을 조사하거나 징계 절차에 착수하지 않았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 재판에서 공개된 당시 문건들을 보면 법원행정처는 사실관계 확인을 통한 책임 추궁보다는, 비위 의혹이 언론에 보도돼 사법부 신뢰가 추락할까를 걱정했다. 이듬해에는 건설업자의 2심 판결 선고를 미뤄서라도 언론 보도를 막으려 했다. 비위 의혹에도 인사평정 ‘상’ 등급을 받은 문 전 판사는 아무런 불이익 없이 그대로 퇴직했다. 양 전 대법원장 등의 직무유기와 직권남용 혐의는 법원 내 윤리감사 기능의 실종을 보여준다.

■ 조사하지 않은 비위 의혹

뇌물 사건 피의자 접대 받은 판사

비위 조사나 징계 절차 없이 퇴직


지난해 12월11일 양 전 대법원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김세윤 판사는 임 전 차장이 “검찰 고위 간부로부터 받았다”면서 대검찰청의 첩보 문서를 보여줬다고 증언했다. 김 판사는 2015년 법원행정처 윤리감사관이었다.

김 판사는 임 전 차장과 나눈 대화 내용을 ‘문○○ 부장 향응 수수 의혹 첩보’ 보고서로 작성했다. ‘대응협의’ 부분에는 “부산고법원장이나 행정처 윤리감사관실에서 정식으로 문 부장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면 법원 감사위원회의 필요적 심의대상인 ‘법관의 (직무 관련) 금품, 향응 수수에 대한 감사사건’이 됨→외부로 알려지는 것이 불가피”라는 문구가 나온다. 언론 보도를 우려한 것이다. 그다음엔 “현재 검찰과의 관계가 매우 좋아 검찰이 언론에 흘릴 위험은 없어 보이므로(차장님 말씀), 경과를 지켜보면서 어떻게 조사 또는 대응할지 결정하기로 함”이라고 이어진다.

김 판사는 “(임 전 차장이) 조사를 하라는 말은 없었다”고 했다. 반면 그는 “(첩보 문서의) 내용을 봤을 때 조사가 필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사실로 확인된다면 (징계)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 판사는 검찰 조사에서는 이런 진술도 했다. “차장님은 검찰과의 관계가 좋아서 외부 유출 위험이 없다고 하셨지만, 저는 만약 그런 예상과 달리 외부에 알려지면 ‘제 식구 감싸기’라는 비난을 받을 여지가 있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걱정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결국 윤리감사관실은 문 전 판사 조사에 착수하지 않았다. 그래도 문 전 판사에게 경고 메시지라도 줘야 된다는 판단하에 박병대 법원행정처장이 윤인태 부산고등법원장(현 변호사)에게 연락해 ‘구두 경고’하는 방안을 이야기했다.

■ 비위 의혹에도 평정은 ‘상’

언론 보도 가능성 따져 본 행정처

해당 법원장에 구두 경고 지시만

피의자 2심 선고 앞두고 다시 돌출

“항소기각 땐 검찰이 유출할 수도”

판사 사표 뒤 판결 나오도록 작전


지난해 12월18일 증인으로 나온 윤 전 원장은 박 전 처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지만 문 전 판사 비위 의혹을 심각하게 이해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법원장도 독자적인 비위 조사와 징계 청구 권한을 갖고 있지만, 윤 전 원장은 조사하지 않았다.

“문 전 판사 비위 의혹을 전해 듣고도 직무 관련성이 있는지에 관해 감사 조사를 실시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검사)

“판사가 밖에 계시는 분들과 공을 쳤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범죄가 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감사를 하지 않았습니다.”(윤 전 원장)

“그렇다면 구두 경고를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검사)

“범죄가 되지는 않지만 품위손상이 될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윤 전 원장)

“그래서 구두 경고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나요?”(검사)

“제가 마음을 먹었다기보다는 법원행정처에서 구두 경고를 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그대로 시행했습니다.”(윤 전 원장)

문 전 판사의 비위 의혹은 근무평정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도리어 윤 전 원장은 문 전 판사의 2015년 근무평정에 ‘상’ 등급을 매겼다. 평정엔 “업무는 물론 업무 외적인 면에서도 최선을 다함” “법관으로서 좋은 자질을 갖추고 있음” “상위 보직에 보함이 적정함”과 같은 좋은 평가들이 적혔다. 평정을 매길 때로부터 불과 2~3개월 전 외부인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로 구두 경고를 받은 문 전 판사에게 어떻게 이런 평가를 할 수 있는지 검사가 물었다. 윤 전 원장은 문 전 판사를 봐주려는 의도는 없었고 단순 실수였다고 했다. “제가 깜빡하고 (경고한 사실을) 누락했다. 죄송하다”고 했다.

양승태 대법원이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언론에 기고한 판사는 ‘물의 야기 법관’으로, 대법관 후보자 사퇴 촉구 글을 쓴 판사는 ‘형사재판에 부적절하다’는 딱지를 붙인 것과 대조되는 장면이다.

■ 피고인들 “직무 관련성 없다”

그렇게 지나간 줄 알았던 문 전 판사 의혹은 2016년 9월 다시 불거졌다. 현직 법관이 뇌물수수 혐의에 연루된 ‘정운호 게이트’ 때문에 법원이 홍역을 치르고 난 때다. 문 전 판사가 건설업자 1심 재판부 심증을 유출한 의혹이 있다는 보고가 법원행정처에 들어왔다. 건설업자는 1심에서 뇌물공여 혐의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법원행정처는 이번에도 언론 보도를 걱정했다. 비위 의혹 조사는 법원행정처 관심이 아니었다. 김세윤 판사의 후임 윤리감사관인 김현보 판사(현 변호사)가 2016년 9월28일 ‘문○○ 고법판사 관련 사항’ 보고서를 작성했다. 건설업자의 2심 재판은 9월22일 이미 변론을 종결하고 11월24일 선고를 앞두고 있었다. 보고서엔 “항소 기각 선고될 경우 검찰에서 의도적으로 관련 의혹 유출할 가능성”이라며 “현재 상태에서 (언론) 보도 시 1·2심 재판 결과에 대한 의혹에서 나아가 사법부 내부에서 재판의 독립을 스스로 침해하는 듯한 모습까지 확대 가능”이라고 나온다. 김 전 판사는 임 전 차장에게 들은 내용을 정리했다고 했다.

조사를 왜 안 했느냐는 질문에 지난 11일 증인으로 나온 김 전 판사는 “비위 문제라기보다는 상황을 검찰이 바라보는 시각이 우려됐다”고 했다.

“검찰 시각이 우려되더라도 문 전 판사에게 법관윤리 차원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인가요?”(검사)

“임 차장님이 이러저러한 게(검찰 시각) 걱정이라고 하셔서, 제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김 전 판사)

“문 전 판사의 행동이 법관으로 부적절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까?”(검사)

“그때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못했습니다.”(김 전 판사)

법원행정처는 언론 보도를 무마하려는 대응책으로 2심 판결 선고를 미룰 계획도 세웠다. 문 전 판사가 사표를 낸 다음에 판결이 나와야 의혹이 터지더라도 법원이 논란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고서엔 “직권 재개 후 1~2회 추가 진행→항소심 충실 심리 및 파기 가능성 현출”이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윤 전 원장을 통해 건설업자의 항소심 사건을 심리 중인 재판부의 재판장 김주호 판사에게 변론 재개를 요청하려고 한 내용이다. 보고서 군데군데엔 ‘보안’을 강조하는 문장들이 있다.

윤 전 원장은 검찰에서는 고영한 전 처장이 ‘변론을 재개해 더 충실히 심리해달라’고 말했다고 진술했지만, 법정에 와선 “천천히 선고했으면 좋겠다는 말은 들었는데 구체적으로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윤 전 원장은 고 전 처장 말을 재판장인 김 판사에게 전했다고 했다. 변론이 종결됐는데 천천히 선고했으면 좋겠다고 법원장이 말한 적은 이 사건이 유일하다면서도 법관의 독립을 해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실체 관계에 관련된 게 아니라 적절한 시기의 선고라는, 절차적인 문제에 관계되는 것이라서 법원장으로서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윤 전 원장) 김 판사는 변론을 재개했다. 문 전 판사가 2017년 2월9일 사직하고 일주일 뒤인 2월16일 판결을 선고했다. 2심은 실형이었다.

양 전 대법원장 등 피고인들은 만약 문 전 판사에게 범죄혐의가 있었다면 검찰이 수사를 했을 것이라면서, 수사는 안 하고 법원행정처에 첩보 문서만 넘겼기 때문에 사법행정권자에게 문 전 판사를 감사해야 할 의무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문 전 판사 행위가 직무 관련성이 있는지 확인되지 않아 구두 경고로 충분했고, 변론 재개는 해당 재판부가 독자적으로 결정했다는 입장이다. 양 전 대법원장 측 이상원 변호사는 “검찰이 수사를 안 하고 넘겼다는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검찰도 (문 전 판사의 밥·술·골프가) 직무 관련성이 없다고 생각했다는 의미”라며 “만약 직무 관련성이 있을 수도 있는 사안에 대해 법원행정처에 그냥 (첩보 문서로) 넘겼다면 (오히려 검찰이) 직무유기이거나, 비밀누설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변호인들 주장에 대해 김세윤 판사는 이렇게 증언했다. “조사를 해봐야 직무와 관련성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있기 때문에 일단 사안이 어떤지 확인해볼 필요는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대법원은 법원 자체적인 윤리감사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지적에 따라 법원행정처 윤리감사관을 판사가 아닌 외부인이 맡도록 바꿨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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