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대피·차량 시위 이끈 남편 뒷받침 "자식들에게 더 나은 세상 줄 거라 믿어"
5·18 '택시운전사' 장훈명씨의 부인 송미령씨 |
(광주=연합뉴스) 장아름 기자 = "온몸에 유리 파편이 박히고 멍이 든 채 병원에 누워있는 남편을 보고 나서야 그동안 무슨 일을 하고 다녔는지 알았죠."
송미령(63)씨는 1980년 5·18 민주화운동 기간 광주에서 시민들을 대피시키고 택시·버스 기사들의 차량 시위를 이끈 택시기사 장훈명(67) 전 5·18 구속부상자회 부회장의 부인이다.
장씨는 영화 '택시운전사' 속 광주의 토박이 기사들처럼 불의에 맞섰고 5·18이 끝난 후에도 전두환 처벌을 요구하며 시민운동을 했다.
영화에서 다친 시민들을 병원에 옮기고 김만섭(송강호)과 피터(토마스 크레취만)에게 선뜻 숙식을 제공하고 탈출을 도운 황태술(유해진)이 장씨를 연상하게 한다.
영화 '택시운전사' |
부산 출신인 송씨는 타향에서 남편밖에 의지할 곳 없는 어린 임산부였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남편의 활동을 지지하고 뒷받침해왔다.
송씨가 기억하는 1980년 5월의 광주 시내는 최루탄 냄새가 항상 났다.
이웃들은 "학생들이 맞는다. 죽은 사람도 있다"며 도청으로 향했고 옆집 아저씨가 며칠을 안 들어왔다며 아기 엄마가 머리를 싸매고 드러눕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송씨는 출근한 줄로만 알았던 남편이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위 학생들을 연행하는 계엄군 |
계엄령 발포 후 도심에 차 구경하기가 힘든 탓에 산수동 집에서 대인동 병원까지 만삭의 배를 잡고 몇걸음 가다 쉬고를 반복하며 걸어갔다.
송씨는 "이불에 쌓인 그 사람 모습을 보니 너무 무섭고 어떻게 이럴 수 있나 분한 마음도 들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송씨는 "당시 부산의 친정 식구들이 나하고 연락이 안 돼 엄청 걱정했다"며 "그런데도 살면서 수시로 말해도 믿지 않더라. '어떻게 군인이 시민들을 폭행하고 죽게 하느냐'며 나더러 '여기서 물들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남편은 퇴원 후에도 송씨 모르게 서울 연희동 전두환 집 앞과 국회에 찾아가 시위하기를 반복했다.
1986년부터는 동료들과 민주기사동지회를 꾸려 매년 5·18 마다 차량 시위를 재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심전심이었을까.
송씨는 자신이 걱정할까 봐 남편이 다른 말을 하고 가는 걸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트라우마에 괴로워하던 남편은 택시 일도 꾸준히 할 수 없었다.
송씨는 돌도 안 된 아기를 업고 일하며 남편과 함께 투쟁하는 동료들에게 밥을 싸 보내면서 묵묵히 응원했다.
봉투 붙이기부터 옷 판매, 식당 일까지 갖은 고생을 했지만 찬조금과 따뜻한 밥 한 끼까지 챙기며 5·18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남편과 동료들의 투쟁 지지대 역할을 했다.
남편은 1991년 시위 중 전경들에게 구타당해 숨진 강경대 학생의 관을 정부가 광주에 못 들어오게 하자 맨몸으로 길을 뚫고 온 날에서야 부인에게 처음으로 자신이 한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5·18 민주기사의 날 차량 시위 재현 |
인터뷰 내내 부인의 주변을 몇차례나 오가던 장씨는 "나같이 고생시킨 사람 없지"라며 멋쩍은 위로를 건넸다.
송씨는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제발 나가지 말라고 남편을 붙잡고 싶다면서도 "당시에도 이 사람이 하는 일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우리 자식들이 살아갈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일이라고 여겼다. 남편이 허투루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나 역시 함께했던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5·18 40주년을 앞두고 송씨는 "살아보니 용기 내는 것만큼 초심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더라. 대동 정신이 대단한 게 아니다. 자기 이익만 좇지 말고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눌 줄 아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areu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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