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총선을 앞두고 진보진영의 시민단체와 원로인사들이 추진하는 비례대표 연합정당인 '정치개혁연합(가칭)이 지난 3일 정식 창당절차에 돌입했다.
발기인으로 한완상 전 부총리, 함세웅 신부, 영화배우 문성근씨,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인 하승수 변호사, 칼럼니스트 황교익씨 등 220명이 참여했다.
범친여세력이 정치개혁연합에 참여해 비례대표 후보를 파견한 뒤 총선 후 당선자들이 각 정당에 복귀하는 방식이 유력하다.
더불어민주당은 직접 비례대표 위성정당을 창당할 경우 비난이 쏟아질 것을 우려해 정치개혁연합에 참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 분위기다.
민주당은 정의당, 민생당 등 군소정당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자신들의 비례대표 번호를 후순위로 받는 식으로 '양보'하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정의당과 570여개 시민단체들이 "선거제도 개혁을 내세웠던 민주당의 자가당착"이라고 반대하고 있어 성사 여부는 불투명하다.
여당은 그동안 미래통합당의 비례대표 전용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에 대해 '위장정당' '꼼수정당'이라며 강도높게 비난해왔다.
이해찬 대표는 지난 1월 "국민의 투표권을 침해하고 결국 정치를 장난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일갈했고, 이인영 원내대표도 지난달 18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미래통합당이 국회 제1당이 되고자 민주주의도, 정당정치도, 국민의 눈초리도, 체면도, 염치도 모두 버렸다"고 성토했다.
그랬던 여당이 "명분이 없다"는 당내 일부 의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돌연 입장을 바꾼 것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처음 적용되는 이번 총선에서 종전대로 선거를 치렀다간 원내 제1당을 뺏길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에서다.
실제로 각 당의 시뮬레이션결과 민주당이 미래한국당에 대한 맞불을 놓치 않으면, 미래한국당이 준연동형이 적용되는 비례대표 의석(30석) 중 20석 이상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여당이 제1당을 뺏기면 국회의장도 바뀌게 되고, 총선후 밀어붙이려 한 국가보안법 폐지 등도 무산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이 140만명을 넘은 상황에서 여당이 야권에 과반을 뺏길 경우 향후 국정 운영에 심각한 차질이 빚어질 수도 있다.
민주당으로선 일부 박빙 지역구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범여권진영의 의석수를 늘려 미래통합당이 제1당으로 올라서는 최악의 상황을 막아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민주당은 정치권 안팎의 부정적 여론을 의식한 듯, "정봉주 전 의원이나 무소속 손혜원 의원이 주도했던 위성정당과 진보세력의 연합정당은 전혀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들에게는 위성정당 창당이나 연합정당 참여 모두 불리한 선거 판세를 만회하려는 여당의 '꼼수'로 비칠 뿐이다.
주목할 점은 민주당의 '비례정당'논의가 문재인 대통령의 복심으로 알려진 윤건영 전 청와대 국정기획상황실장이 군불을 때면서부터 급물살을 타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 성북구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한 윤 전 실장은 '문재인의 남자'라 불릴 만큼 문 대통령과 가깝다.
청와대 시절 하루 수차례 대통령에 대면 보고를 하는 것은 물론 주중 현안점검회의 후 소수 참모만 참석하는 '티타임'에도 고정적으로 참석할 정도로 대통령의 신임이 두텁다.
오죽하면 진중권 전 동양대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조국 사태의 발단은 대통령 복심으로 통하는 윤건영"이라며 "조국 전 법무장관이 온갖 의혹으로 국민에게 부적합한 판정을 받았을 때 조국 임명 강행을 주장한 게 바로 윤건영"이라고 지적했겠나.
그런 윤 전 실장이 지난달 21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민주당의 위성정당 창당에 대해 "이번 선거에선 민심이 왜곡될 우려가 있다는 걱정이 있다"면서 "그런 비상한 상황이 벌어지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판단해야 한다"고 밝힌 것은 의미심장하다.
당시만 해도 여당 지도부의 인식과 결이 다른 발언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윤 전 실장의 언급대로 여당의 비례정당 논의가 구체화하고 있다.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 윤호중 사무총장, 홍영표 전 원내대표, 전해철 김종민 의원 등 여당 실세 5명이 얼마 전 긴급회동을 갖고 "대통령 탄핵을 막으려면 비례대표 창당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모은 것도 같은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에 비춰보면 여당이 참여를 검토 중인 '정치개혁연합'도 당청간 가교역할을 하는 윤 전 실장을 매개로 청와대와의 교감 속에서 진행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민주당은 지난해 문 대통령의 공약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설치법' 통과를 위해 범여 군소정당들과 밀실야합을 통해 '4+1 협의체'를 만든 뒤 '게임의 룰'인 선거법을 제1 야당도 배제한 채 일방적으로 처리했다.
민주당은 당시 "다양한 민심을 반영하고 다당제와 협치를 이루려면 준연동형 비례제 도입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그런 여당이 이제와서 비례대표 의석을 몇개 더 얻겠다고 선거제개혁의 약속을 뒤집고 얄팍한 꼼수를 부리는 것은 최소한의 정치적 도의와 부끄러움도 모르는 행위다.
민주당이 미래한국당 창당 때 비난한 것처럼, 반칙과 요행으로 기득권을 지켜보겠다는 것은 우리 국민의 수준높은 정치의식을 무시하는 오만한 발상이자, 정치 퇴행일 뿐이다.
온 국민이 '코로나19'에 대한 정권의 총체적 방역실패로 극심한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상황에서 여당이 선거마저 국민의 선택권을 무시하고 민주주의를 교란시킨다면 국민들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될 수 밖에 없다.
민주당은 차라리 선거법 강행처리에 대해 지금이라도 국민 앞에 솔직히 사과하고, 비례정당 창당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것이 도리다.
[박정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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