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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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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억불책의 결과인가?…경주읍성 축조에 통일신라 팔부중상 재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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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조선조 세종시대에 축조한 경주읍성 치성에서 확인된 통일신라시대 팔부중상 면석. 아마도 세종의 억불책에 따라 폐사된 어느 절터에서 가져와 읍성 치성 축조에 재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문화재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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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축조한 성벽에서 통일실라시대 석탑에 사용된 팔부중상 면석 3매가 확인됐다. 성벽을 쌓는 이들이 이 팔부중상 면석을 기단석으로 재사용한 것이다.

한국문화재재단은 경북 경주읍성(사적 제96호) 5구간의 조선시대에 축조된 성벽을 조사하던 중 통일신라시대 석탑에 사용된 팔부중상 면석 3매가 기단석으로 재사용되었음을 확인했다고 21일 밝혔다. 팔부중은 부처의 설법 청중을 구성하는 다양한 무리 중 하나다. 인간 이외의 다양한 존재를 일컫는 집합적 용어다.

천(天·하늘의 모든 신)·가루라(迦樓羅·상상의 새), 용(龍·용의 신)·야차(夜叉·귀신), 건달바(乾달婆·허공을 날며 음료와 약품을 제공하는 신)·아수라(阿修羅·전쟁터에 머무는, 얼굴이 셋인 귀신들의 왕), 긴나라(緊那羅·춤과 노래를 잘하는 귀신)·마후라가(摩喉羅伽·몸은 사람과 같고 머리는 뱀과 같은 신) 등을 가리킨다. 하늘의 천신(天神), 땅에 사는 지신(地神)과 축생(畜生), 물에 사는 수신(水神), 그리고 인간도 신도 아닌 반인반신(半人半神)이나 귀신같은 것들을 뜻한다. 팔부중상의 면석은 다른 나라, 다른 시대의 탑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고 통일 신라시대 석탑에서 창안된 독특한 부조상이다.

‘팔부중상’ 이 부조된 탑재 3매는 경주 읍성의 동문 및 성벽의 북쪽구간 부근의 치성 중 가장 아래인 기단석으로 사용됐다. 이 팔부중상 면석이 어느 탑의 것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경주지역에서 팔부중상이 부조된 석탑 및 탑재는 담엄사지 석탑재, 창림사지 석탑, 남산리사지 서탑, 숭복사지 동·서탑, 인왕동사지(傳 인용사지) 동서탑재, 사제사지 탑재 등이 있다. 그러나 이번에 발견된 팔부중상 탑재와 같은 도상(圖上)의 것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조각 전체가 8세기대의 조각양상에 비해서 정교하지 못한 편이고, 천의 자락 날림이 부자연스럽고 손 모양도 변형되어 있다. 재단측은 “이로 미루어 이 팔부중상은 9세기 중반 무렵 제작된 것으로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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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부중상 면적이 확인된 경주읍성 치성구간. |한국문화재재단 제공


팔부중상 면석이 확인된 경주 읍성의 치성은 조선조 세종 시대(재위 1418~1450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최진녕 한국문화재재단 조사연구3팀 책임조사원은 “조선 건국 이후 숭유억불책에 따라 폐사된 절터에서 이러한 면석들을 가져와 다른 건물 건축에 재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세종은 1424년(세종 8년) 불교의 7개 종을 선·교(禪·敎) 양종(兩宗)으로 통합하고, 국가 공인의 사찰이 242사에서 36사로 축소한 데 이어 1449년(세종 31년)에는 도성 내에 흥천사와 흥덕사만을 남기고 모든 사원을 철폐하는 등 억불책을 폈다. 이마 이 무렵 건립된 다른 건물의 공사에 폐사된 곳의 부재들을 재사용했을 것이다. 박종섭 재단 조사연구3팀장은 “팔부중상의 석재가 석재로 재사용된 사실은 당시 불교에 대한 인식과 사상적인 면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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