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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잘하는 사람을 따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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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지난 9일(현지시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 이후 봉준호 감독이 6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안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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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민의 톡팁스-41]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듣고 싶은 말을 하라

"어렸을 적 영화 공부를 할 때 가슴에 새겼던 말이 있습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란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한 말입니다."

2020년 2월 9일 일요일, 미국 LA 돌비극장에서 개최된 제92회 오스카상 시상식에서 4개 부문을 석권한 영화 '기생충'을 연출한 봉준호 감독의 감독상 수상 소감이다.

모든 영화인의 꿈 오스카상을 수상한 그 순간, 봉 감독은 객석에 앉아 있는 스코세이지 감독을 손으로 가리켰다. 갑자기 봉 감독에게 집중하던 카메라가 스코세이지 감독에게 옮겨졌다. 봉 감독 호명에 스코세이지 감독은 살짝 놀란 듯했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싫지 않은 얼굴이었다. 멀리 지구 반대편에서 '기생충'이라는 영화를 만들어 미국 영화인의 잔치 오스카상 시상식에 찾아온 한국 감독에게서 자신의 이름이 불린 것이 감격스러운 모양이었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오른손을 살짝 들어 봉 감독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정말로 기쁜 표정을 지으면서, 파안대소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상황이 급변했다. 관객 시선 전체가 순간 스코세이지 감독에게 집중됐다. 급기야 전원 기립박수를 치면서, 스코세이지 감독을 환호했다. 오스카상 감독상 수상자 봉 감독보다, 객석에 앉아 있던 스코세이지 감독이 더 주목받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봉 감독은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스코세이지 감독에게 돌리며, 아시아 감독 최초로 오스카상 감독상을 받은 소감을 밝혔다.

돌비극장을 가득 채운 관객은 너나 할 것 없이 할리우드를 주름잡는 배우들과 영화 관계자들이었다. 그들 중 스코세이지 감독을 모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지금까지 9번 노미네이트돼 단 한 차례밖에 오스카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스코세이지 감독이 미국 국민감독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었다. '택시 드라이버'(1976), '성난 황소'(1980), '컬러 오브 머니'(1986), '좋은 친구들'(1990), '갱스 오브 뉴욕'(2002), '디파티드'(2006), '셔터 아일랜드'(2010),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2013) 등을 감독했고, 이번 오스카상에도 '아이리시맨'(2019)으로 노미네이트된 상황이었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봉 감독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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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으로 세계를 홀린 봉준호 감독이 지난 9일(현지시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 수상 소감을 밝힐 때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을 인용한다며 소개한 말이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사진=스코세이지 감독 인스타그램 계정 캡처. 연합뉴스


◆칭찬받고 싶을 때, 칭찬하라

"제가 학교에서 마틴의 영화를 보면서 공부했던 그런 사람인데, 같이 후보에 오른 것만도 영광인데, 상을 받을 줄 전혀 몰랐었고요."

미국 국민감독이라고 할지라도, 씁쓸한 속내를 감출 수는 없었을 것이다. 1967년 '아이 콜 퍼스트' 감독을 시작으로, 지난 53년간 100편이 넘는 영화를 감독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스카상은 단 한 차례밖에 스코세이지 감독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79세의 스코세이지 감독이 이번 오스카상 시상식에도 정장을 차려입고 앉아 있던 것은 '혹시나 이번에는'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오스카상 감독상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한국의 봉 감독에게 돌아갔고, 자신은 객석에 앉아 박수쳐야만 했다. 그 스코세이지 감독에게 봉 감독은 감사를 표했다.

돌비극장에 있던 관객들이 스코세이지 감독을 향해 전부 일어서서 박수를 친 것은 봉 감독 수상으로 잠깐 잊고 있었던 스코세이지 감독에 대한 안타까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봉 감독은 자신의 감격을 드러내는 대신, 스코세이지가 자신의 스승이라고 밝힌 것이다. 책을 통해서였지만, 스코세이지 감독의 가르침을 받아 이 자리에서 오스카상 감독상을 받게 됐다고 고백한 것이다. 따라서 내가 받는 이 상에는 나를 가르친 스코세이지 감독의 몫도 포함돼 있다는 뜻이었다.

봉 감독의 감사는 오스카상 감독상을 수상하지 못한 스코세이지 감독을 오히려 그보다 더 높은 격조를 가진 사람으로 만들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한국 감독에게 오스카상 감독상을 받게 만든 조언을 해준 위대한 스승이라는 사실을 밝혀줬기 때문이다. 봉 감독은 모든 영광을 스코세이지 감독에게 돌렸다.

봉 감독은 칭찬받고 싶을 때, 칭찬했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스코세이지 감독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오스카상 감독상을 받는 개인적인 순간에, 봉 감독은 어떻게 하면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극적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창의적으로 발상을 한 것이다.

◆잘하는 사람을 따라 해야 한다

"저의 영화를 아직 미국 사람들이 모를 때, 항상 제 영화를 리스트에 뽑고 좋아해준 우리 쿠엔틴 형님이 계신데 정말 사랑합니다. 그리고 같이 후보에 오른 우리 토드(토드 필립스)나, 샘(샘 멘데스)이나, 다 제가 존경하는 멋진 감독들인데, 오스카 측에서 허락한다면, 텍사스 전기톱으로 이렇게 다섯 개로 잘라서, 나누고 싶은 마음입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내일 아침까지 술을 마실 겁니다."

스코세이지 감독에 대한 감사에 이어, 봉 감독은 함께 후보에 오른 쿠엔틴 타란티노, 토드 필립스, 샘 멘데스를 추켜올렸다. 박수를 치고는 있었겠지만, 속상한 마음은 한이 없을 것이었다. 그중 누구도 자신의 작품이 봉 감독 작품 '기생충'에 밀린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봉 감독은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봉 감독은 오스카상 감독상을 받은 자신의 소감보다 함께 후보에 오른 다른 감독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지 소개했다. 그렇다고 해서 봉 감독 수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봉 감독은 수상 소감으로 가장 필요한 말을 했다.

1년이 지나도, 혹은 10년이 지나도, 아니 어쩌면 앞으로 상당 기간, 한국인으로서 오스카상 감독상을 받는 감독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2020년 제92회 오스카상 감독상 수상자 봉 감독은 불변의 사실이다. 우리 세대에 다시 없는 일일 수 있다.

자신의 수상으로, 오스카상이 로컬 영화제에서 인터내셔널 영화제로 전환된다는 사실을 인식한 봉 감독은 배우가 되어 인상적인 영상을 연기해냈다. 상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배려하는 훈훈한 수상 소감을 남기는 것이었다. 그것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흔한 장면이었다. 진심을 담아, 봉 감독은 훌륭한 수상 소감들을 따라한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듣고 싶은 말을 하라. 칭찬받고 싶을 때, 칭찬하라. 잘하는 사람을 따라 해야 한다."

[이성민 미래전략가·영문학/일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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